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마르 14,21)
시작점은 언제나 0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0가 아닌 것이 이미 우리는 은총을 많이 받은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탄생의 순간부터 이미 지니고 있는 축복이 많습니다. 인간은 악에서 보호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갓난 아이가 사물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말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실은 ‘보호’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이의 지성이 깨어나 이해가 시작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아이는 점점 자라나고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늘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는 타인의 영향 속에서 수동적으로 자라나지요. 특히나 부모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에게 전해지는 부모의 모범은 그 아이의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부모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이는 곧 나가서 친구들을 사귀고 또 다른 어른들의 모습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분별하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되고, 다른 아이를 이유없이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신이 아는 바 안에서 할 수 있는 결정들이 주어집니다. 이 선택은 온전히 열린 것이며 오로지 자신의 몫입니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어가고, 때가 되면 온전한 독립을 이룹니다. 나아가 자신이 보살펴야 할 가족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의지 속에 깊이 들어있는 자유를 고스란히 지니고 살아가지요. 그리고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퇴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처음 상태보다도 못한 방향으로 물러나는 것이지요. 즉, 복음의 유다처럼 ‘무죄한 이를 해코지’하려는 사람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 악을 더 큰 악으로 갚으려는 사람이지요.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이 나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요. 간단한 예로, 본인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서 담배를 태우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맞지만 태우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 간절해서 금연의 요구를 하는 부모님에게 짜증을 내는 식입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선한 마음에 ‘짜증’이라는 악으로 되돌려주는 모양입니다. 이런 단순한 일부터 시작해서 인간은 악에 사로잡히고 나면 오로지 자신의 욕구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는 악한 일이라도 그것을 되갚으려는 시도 안에서 ‘더 큰 악’을 자행하는 일이 존재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된 일을 했을 때에 정의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흔히 우리가 받은 것 이상으로 상대에게 되갚으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악은 증폭되고 마는 것이지요. 악의 순환고리는 갈수록 커지기만 하고 끊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지금의 현대인들이 많이 성찰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사회적인 이슈 안에서 의로운 일을 한다면서 나서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런 부류가 적지 않습니다. 공분을 사고 악을 증폭시키는 이들이지요.)
이렇게 ‘악’을 향해서 방향설정을 한 사람, 그는 성경의 표현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이들입니다. 물론 사람이 이제 와서 태어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이 표현은 그가 스스로 깨달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악을 자행하는 이들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악에로 더욱 굳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시작점은 언제나 0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0가 아닌 것이 이미 우리는 은총을 많이 받은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탄생의 순간부터 이미 지니고 있는 축복이 많습니다. 인간은 악에서 보호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갓난 아이가 사물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말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실은 ‘보호’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이의 지성이 깨어나 이해가 시작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아이는 점점 자라나고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늘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는 타인의 영향 속에서 수동적으로 자라나지요. 특히나 부모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에게 전해지는 부모의 모범은 그 아이의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부모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이는 곧 나가서 친구들을 사귀고 또 다른 어른들의 모습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분별하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되고, 다른 아이를 이유없이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신이 아는 바 안에서 할 수 있는 결정들이 주어집니다. 이 선택은 온전히 열린 것이며 오로지 자신의 몫입니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어가고, 때가 되면 온전한 독립을 이룹니다. 나아가 자신이 보살펴야 할 가족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의지 속에 깊이 들어있는 자유를 고스란히 지니고 살아가지요. 그리고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퇴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처음 상태보다도 못한 방향으로 물러나는 것이지요. 즉, 복음의 유다처럼 ‘무죄한 이를 해코지’하려는 사람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 악을 더 큰 악으로 갚으려는 사람이지요.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이 나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요. 간단한 예로, 본인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서 담배를 태우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맞지만 태우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 간절해서 금연의 요구를 하는 부모님에게 짜증을 내는 식입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선한 마음에 ‘짜증’이라는 악으로 되돌려주는 모양입니다. 이런 단순한 일부터 시작해서 인간은 악에 사로잡히고 나면 오로지 자신의 욕구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는 악한 일이라도 그것을 되갚으려는 시도 안에서 ‘더 큰 악’을 자행하는 일이 존재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된 일을 했을 때에 정의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흔히 우리가 받은 것 이상으로 상대에게 되갚으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악은 증폭되고 마는 것이지요. 악의 순환고리는 갈수록 커지기만 하고 끊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지금의 현대인들이 많이 성찰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사회적인 이슈 안에서 의로운 일을 한다면서 나서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런 부류가 적지 않습니다. 공분을 사고 악을 증폭시키는 이들이지요.)
이렇게 ‘악’을 향해서 방향설정을 한 사람, 그는 성경의 표현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이들입니다. 물론 사람이 이제 와서 태어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이 표현은 그가 스스로 깨달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악을 자행하는 이들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악에로 더욱 굳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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