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충격요법을 좋아합니다. 사람을 깜짝 놀래켜서 일순간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것이지요. 누가 나쁜 짓을 한다고 하면 한번 호되게 당하게 해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방법을 전혀 쓰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에 상존하는 은근한 욕망을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옆에서 술을 아무리 마시지 말라고 해도 술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그는 언젠가는 다시 술을 마시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술을 더 마시게 되지요. 옆에서 귀찮게 하는 사람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가 사라지는 순간 지금껏 미뤄왔던 욕구를 더해서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인간의 내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30-31)
그래서 하느님이 쓰는 방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실 복음의 부자는 하느님의 방법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라자로’ 였지요. 부자는 일상을 호화로움 속에서 쾌락으로 가득 채워 가면서 어느새 자기 집 앞에 머물러 있었던 라자로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하지만 부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식탁에서 남는 것으로도 그를 살리려는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정반대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라자로를 보면서 불쾌해하고 얼른 다른 곳으로 꺼져 버리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실 부자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푼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보고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부자는 그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을 가장 가까이 두고서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지요. 그리고 결국 일은 벌어지고 맙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변에 늘 ‘당신의 손길’을 두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선에서 우리에게 늘 따스한 조언을 해 주시지요. 그러나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그 충고를 듣고 방향을 돌리거나 아니면 있는 그대로 살아가거나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요.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 25-26)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방법을 전혀 쓰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에 상존하는 은근한 욕망을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옆에서 술을 아무리 마시지 말라고 해도 술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그는 언젠가는 다시 술을 마시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술을 더 마시게 되지요. 옆에서 귀찮게 하는 사람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가 사라지는 순간 지금껏 미뤄왔던 욕구를 더해서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인간의 내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30-31)
그래서 하느님이 쓰는 방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실 복음의 부자는 하느님의 방법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라자로’ 였지요. 부자는 일상을 호화로움 속에서 쾌락으로 가득 채워 가면서 어느새 자기 집 앞에 머물러 있었던 라자로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하지만 부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식탁에서 남는 것으로도 그를 살리려는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정반대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라자로를 보면서 불쾌해하고 얼른 다른 곳으로 꺼져 버리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실 부자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푼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보고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부자는 그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을 가장 가까이 두고서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지요. 그리고 결국 일은 벌어지고 맙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변에 늘 ‘당신의 손길’을 두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선에서 우리에게 늘 따스한 조언을 해 주시지요. 그러나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그 충고를 듣고 방향을 돌리거나 아니면 있는 그대로 살아가거나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요.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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