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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전능의 의미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렇습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분은 무능력해 보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악인은 활개를 치고 선인은 핍박받는 현실이 속상하고 하느님에게 부르짖어 보지만 그 어떤 응답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능함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전능함일까요? 아닙니다. 전능함은 우리가 상상하는 식의 ‘무조건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생각이 갈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 세상이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집세를 왜 내야 하는지, 세금이 도대체 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에는 그저 돈을 내고 장난감 집을 사는 정도의 이해력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어른들이 하는 활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활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감지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느님은 그보다 훨씬 넓은 크기로 우리를 압도하십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분의 생각이 우리보다 크다고 아무런 이해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서 답을 얻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의 ‘가능’, 아니 그분의 ‘전능’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요?

마리아의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에는 처녀가 임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이라면 유전자 조작으로 가능한 일이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당신이 전능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불가능’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임신한 처녀가 죽지 않고 아내로 맞아 들여지는 사건이었고 그 가운데 일어나는 사람들의 내면의 움직임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더해서 내면의 불가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율법으로는 혼인 전에 불륜을 저지른 경우에는 돌에 맞아 죽어도 시원찮을 상황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역시도 가능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전능입니다.

하느님은 상당히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실은 그 누구의 자유의지도 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전능을 우리의 허락 안에서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마리아의 자유의지가 있었고, 요셉의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허락을 구하시고 당신의 전능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전능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에게 그러한 권능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굳이 동정녀의 동의를 얻을 필요 없이 바로 흙에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당신의 의지로 움직이고, 이런 저런 상황을 조정할 필요도 없이 반대하는 자들을 모조리 멸망시켜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무절제한 권력을 ‘전능’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쓸어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맞는 이들을 원하는 자리에 앉히는 것, 그것은 전능이 아니라 악마의 수단입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그 근본에 ‘사랑’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분의 엄청난 사랑은 피조물에게 동의를 구하는 사랑, 당신을 인간의 지위로 낮추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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