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요한 12,31)
세상의 우두머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을 거머쥐고 있는 가장 큰 우두머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움직이는 방법을 바라보면 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일까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 분별을 위해서는 많은 ‘부차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그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많은 것들을 겪고 결국 같은 곳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지요. 인간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탄생 이후의 순간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은 ‘생존’을 위한 것이 기본입니다. ‘살아 남으려는 노력’인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살 의욕이 없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서서히 죽어갈 것입니다. 아니, 잠깐 숨만 참아도 머지 않은 시간에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나아가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제 아무리 화려하고 다양한 모습의 부차적인 활동이 있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삶’을 위한 추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죽음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행위들을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왕도 죽고 학자도 죽고 유명한 시인도 결국엔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보다 분명한 어조로 우리에게 감지할 수 있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죽음의 위협과 공포는 은근하면서도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활동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부산히 움직이는 것이지요. 죽음은 그것을 알고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조종하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 주님은 세상의 우두머리가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죽음은 강렬하지만 그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구하시려고 움직이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의 우두머리는 쫓겨나게 됩니다. 죽음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영원한 생명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쉽게 수용하지 못합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생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쉽게 감지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영원은 본디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영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외아들이신 분이 인간에게 이 영원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로부터 영원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요. 인간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춤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는 죽음의 위협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죽음이 극복된 상태의 인간… 그는 더는 ‘생존’에 쫓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이 허락하신 소중한 육신을 돌보는 행위를 할 뿐이지요. 그리고 나아가서 그는 주변 사람들의 영혼을 돌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지요.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죽음의 그늘에 쫓겨 열심히 움직였다면, 지금은 빛을 바라보고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지요.
세상의 우두머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을 거머쥐고 있는 가장 큰 우두머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움직이는 방법을 바라보면 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일까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 분별을 위해서는 많은 ‘부차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그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많은 것들을 겪고 결국 같은 곳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지요. 인간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탄생 이후의 순간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은 ‘생존’을 위한 것이 기본입니다. ‘살아 남으려는 노력’인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살 의욕이 없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서서히 죽어갈 것입니다. 아니, 잠깐 숨만 참아도 머지 않은 시간에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나아가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제 아무리 화려하고 다양한 모습의 부차적인 활동이 있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삶’을 위한 추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죽음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행위들을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왕도 죽고 학자도 죽고 유명한 시인도 결국엔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보다 분명한 어조로 우리에게 감지할 수 있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죽음의 위협과 공포는 은근하면서도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활동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부산히 움직이는 것이지요. 죽음은 그것을 알고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조종하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 주님은 세상의 우두머리가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죽음은 강렬하지만 그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구하시려고 움직이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의 우두머리는 쫓겨나게 됩니다. 죽음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영원한 생명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쉽게 수용하지 못합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생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쉽게 감지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영원은 본디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영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외아들이신 분이 인간에게 이 영원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로부터 영원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요. 인간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춤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는 죽음의 위협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죽음이 극복된 상태의 인간… 그는 더는 ‘생존’에 쫓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이 허락하신 소중한 육신을 돌보는 행위를 할 뿐이지요. 그리고 나아가서 그는 주변 사람들의 영혼을 돌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지요.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죽음의 그늘에 쫓겨 열심히 움직였다면, 지금은 빛을 바라보고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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