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미 열매를 맺고 있는 나무가 조금 더 잘 하면 열매를 조금 더 많이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어가던 나무, 아니 그 정도가 심해서 성한 나무마저도 해를 입히던 나무가 회생하여 해악을 멈추고 자신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그 수확이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물론 계산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죄인이 회개하여 의인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에 그 소출은 엄청난 것이 됩니다. 죄라는 것은 ‘증폭’되고 ‘증가’하는 것이라 죄는 다른 죄를 낳고 선하게 길을 잘 가던 이들도 죄악으로 이끌어들이게 되는데 그런 죄인이 회개를 한다는 것은 일단 그 자신도 구하는 것이지만 그가 저지르던 악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 나라에서 기쁨이 얼마나 클지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영혼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특히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수록 가치가 있습니다. 열심히 빵을 만드는 사람에게 기술을 좀 더 가르쳐 더 나은 빵을 만들게 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지만, 아예 빵을 만들지 않고 빵을 먹어 치우던 사람에게 제빵 기술을 가르쳐 빵을 만들게 하면 빵이 두배로 늘어나는 셈입니다.
사실 이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는 숨은 진리가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아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죄를 저지를 때에 더욱 걱정을 불러 일으킨 아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들의 마음이었지요. 아들이 아버지를 벗어난 것입니다. 아버지는 오매불망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데 그런 아버지를 저버리고 떠난 것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럼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러도 하느님의 아들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동안에는 우리 스스로 하느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세상을 떠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사라졌으니 자동으로 마음이 하느님께로 돌아갈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육신이 사라졌으니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하느님에게서 벗어난 정반대의 방향으로 굳어버리게 됩니다.
큰아들 역시도 작은 아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자비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집에만 함께 물리적으로 살았을 뿐, 실제로는 아버지가 하는 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큰아들은 집을 나간 동생은 ‘제외’시키고 살고 싶었습니다. 헌데 동생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는 도리어 역정이 나버린 셈이었지요. 이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나면 그에 대해서 사정없는 비판을 합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죽여버릴 정도로 비판을 하지요. 헌데 그런 그가 돌아와 하느님의 품에 안긴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과연 우리는 그런 그를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을까요?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정치적으로 시사적으로 공개적으로 매도당하고 있는 한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니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연상해 보면 과연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영혼을 되찾는 작업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보기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전혀 보기 좋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히려 정말 엉뚱하고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가장 증오하는 세상의 누군가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끌어안아 주기를 바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상상으로나마 이해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돌아온 탕자를 반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나라에서 즐거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미 열매를 맺고 있는 나무가 조금 더 잘 하면 열매를 조금 더 많이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어가던 나무, 아니 그 정도가 심해서 성한 나무마저도 해를 입히던 나무가 회생하여 해악을 멈추고 자신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그 수확이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물론 계산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죄인이 회개하여 의인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에 그 소출은 엄청난 것이 됩니다. 죄라는 것은 ‘증폭’되고 ‘증가’하는 것이라 죄는 다른 죄를 낳고 선하게 길을 잘 가던 이들도 죄악으로 이끌어들이게 되는데 그런 죄인이 회개를 한다는 것은 일단 그 자신도 구하는 것이지만 그가 저지르던 악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 나라에서 기쁨이 얼마나 클지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영혼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특히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수록 가치가 있습니다. 열심히 빵을 만드는 사람에게 기술을 좀 더 가르쳐 더 나은 빵을 만들게 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지만, 아예 빵을 만들지 않고 빵을 먹어 치우던 사람에게 제빵 기술을 가르쳐 빵을 만들게 하면 빵이 두배로 늘어나는 셈입니다.
사실 이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는 숨은 진리가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아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죄를 저지를 때에 더욱 걱정을 불러 일으킨 아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들의 마음이었지요. 아들이 아버지를 벗어난 것입니다. 아버지는 오매불망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데 그런 아버지를 저버리고 떠난 것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럼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러도 하느님의 아들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동안에는 우리 스스로 하느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세상을 떠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사라졌으니 자동으로 마음이 하느님께로 돌아갈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육신이 사라졌으니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하느님에게서 벗어난 정반대의 방향으로 굳어버리게 됩니다.
큰아들 역시도 작은 아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자비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집에만 함께 물리적으로 살았을 뿐, 실제로는 아버지가 하는 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큰아들은 집을 나간 동생은 ‘제외’시키고 살고 싶었습니다. 헌데 동생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는 도리어 역정이 나버린 셈이었지요. 이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나면 그에 대해서 사정없는 비판을 합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죽여버릴 정도로 비판을 하지요. 헌데 그런 그가 돌아와 하느님의 품에 안긴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과연 우리는 그런 그를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을까요?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정치적으로 시사적으로 공개적으로 매도당하고 있는 한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니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연상해 보면 과연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영혼을 되찾는 작업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보기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전혀 보기 좋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히려 정말 엉뚱하고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가장 증오하는 세상의 누군가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끌어안아 주기를 바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상상으로나마 이해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돌아온 탕자를 반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나라에서 즐거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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