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바침의 행위 없이는,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 없이는 신앙의 존재여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신앙심이 엄청나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 엄청나다는 신앙심은 드러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사가 100키로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사실 그것이 실험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작 100키로는 커녕 20키로의 무게를 그 위에 얹었을 때에 무너앉아 버린다면 결국 허풍에 불과했음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철사의 강도는 누군가의 허풍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얹고 나서야 드러나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다가온 시련에 대해서 우리는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선함’ 자체도 의심하게 됩니다. 어떻게 유일한 자식의 생명을 내어바치라고 할 수 있는지, 하느님은 행여 새디스트가 아닌지 궁금해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가해진 시련의 강도는 우리로서는 결코 겪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수준의 믿음에 이르지조차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겪은 수준의 시련을 모두 거치고 거쳐서 결국 외아들을 봉헌하는 시련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모두의 믿음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성인들의 삶을 보면서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삶에 우리를 적용시킵니다. 상상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상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상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독한 엄살쟁이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스스로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착각하는 중이지요. 그래서 실제로 시련이 닥쳐오면 ‘투덜거리기’ 바쁩니다. 하느님에게 투정을 부리면서 합당한 변명거리를 찾지요. 즉,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은 다른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내세우면서 말이지요. 천만에요.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내어바치라는 시련 근처에도 가지 못한 셈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결국 아들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바치고 잃은 분이 계시니 바로 ‘하느님’ 당신 자신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사가 100키로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사실 그것이 실험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작 100키로는 커녕 20키로의 무게를 그 위에 얹었을 때에 무너앉아 버린다면 결국 허풍에 불과했음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철사의 강도는 누군가의 허풍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얹고 나서야 드러나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다가온 시련에 대해서 우리는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선함’ 자체도 의심하게 됩니다. 어떻게 유일한 자식의 생명을 내어바치라고 할 수 있는지, 하느님은 행여 새디스트가 아닌지 궁금해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가해진 시련의 강도는 우리로서는 결코 겪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수준의 믿음에 이르지조차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겪은 수준의 시련을 모두 거치고 거쳐서 결국 외아들을 봉헌하는 시련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모두의 믿음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성인들의 삶을 보면서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삶에 우리를 적용시킵니다. 상상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상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상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독한 엄살쟁이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스스로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착각하는 중이지요. 그래서 실제로 시련이 닥쳐오면 ‘투덜거리기’ 바쁩니다. 하느님에게 투정을 부리면서 합당한 변명거리를 찾지요. 즉,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은 다른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내세우면서 말이지요. 천만에요.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내어바치라는 시련 근처에도 가지 못한 셈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결국 아들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바치고 잃은 분이 계시니 바로 ‘하느님’ 당신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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