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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고 힘겨운 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4)

사람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동기만 올바로 부여된다면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힘겨운 짐이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부담이 가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그것이 ‘레저’라는 이름을 달고 휴식의 일환으로 제시되면 몸에 알이 배이더라도 그 일을 해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무겁고 힘겨운 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편하고 좋은 것이라도 내가 원치 않으면 그것은 무겁고 힘겨운 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앙생활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자신은 부담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으려 하면서 타인에게는 부담을 지우는 이들, 그들이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율법의 열쇠를 쥐고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않으면서 오직 ‘계명과 의무’만을 전한 셈이었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그 본질적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계명과 의무의 무게에 허덕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 무게를 교묘하게 피하고 다녔지요.

예를 들어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십일조라는 규정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십일조의 근본은 수입의 십분의 일을 낸다는 퍼센테이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의 근본은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감사히 인정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의 일부를 다시 내어놓아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헌데 이 규정에서 오로지 말 그대로의 십일조만을 강조하고, 그것을 완성하게끔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서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정작 자신들은 그 ‘십일조’의 규정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라는 근거를 애써 찾아내어 하느님에게 아무것도 돌려 드리지 않으려고 하지요.

하느님에게 감사드리는 일,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은 모두가 이루어야 하는 과업입니다. 거기에는 사제고 수도자고 평신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도 하느님께 받은 것을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의 십일조는 하느님을 향한 더 열정적인 봉사가 될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달란트를 최선을 다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수도자 역시도 자신의 봉헌생활을 기쁘게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한 결실로 받은 재물을 봉헌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모습에서 오로지 ‘돈’과 그 ‘양’만을 생각하는 이들은 ‘십일조’의 규정을 강조해서 강요하다시피하고 자신은 그 규정에서 교묘하게 빠져나와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본질을 깨달아 모두가 기쁘게 하느님 앞에 나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나 그런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그런 사실을 주지해서 사람들이 올바로 깨닫고 기쁨 중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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