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괴로운 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첫 숨을 들이키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인간에게는 ‘괴로움’이 늘 함께 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괴로움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괴로움을 다루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회피와 수용입니다.
회피 - 피하는 것은 괴로움을 없애는 ‘빠르고 쉬운’ 방법입니다. 숙제를 하기 싫어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숙제를 면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에 익숙하며 그래서 고난이 생기면 가장 먼저 이 종류의 방법을 떠올립니다. 용서와 사랑을 마주해서도 마찬가지이니 참된 용서와 사랑은 우리에게 굉장한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회피하는 방법으로 ‘증오’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수용 - 고난을 정면으로 대하고 그것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에서 다가오는 고난들을 우리가 나서서 끌어안아 버리는 것이지요. 숙제가 다가오면 숙제를 묵묵히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면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정면으로 다가설 때에 우리의 능력에 따라서 견뎌낼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숙제를 하다가 하다가 다 못할 수도 있고,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시도하다가 시도하다가 결국 이루지 못하고 나 자신의 무능력에 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시도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 안에 힘으로 축적됩니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는 보다 나은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지요.
예수님은 당신 앞에 다가오는 수난의 시간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지요. 당신이 최종적으로 끌어안은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을 얻게 되었고 당신이 정복한 영원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난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12,27-28)
괴로움을 다루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회피와 수용입니다.
회피 - 피하는 것은 괴로움을 없애는 ‘빠르고 쉬운’ 방법입니다. 숙제를 하기 싫어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숙제를 면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에 익숙하며 그래서 고난이 생기면 가장 먼저 이 종류의 방법을 떠올립니다. 용서와 사랑을 마주해서도 마찬가지이니 참된 용서와 사랑은 우리에게 굉장한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회피하는 방법으로 ‘증오’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수용 - 고난을 정면으로 대하고 그것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에서 다가오는 고난들을 우리가 나서서 끌어안아 버리는 것이지요. 숙제가 다가오면 숙제를 묵묵히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면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정면으로 다가설 때에 우리의 능력에 따라서 견뎌낼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숙제를 하다가 하다가 다 못할 수도 있고,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시도하다가 시도하다가 결국 이루지 못하고 나 자신의 무능력에 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시도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 안에 힘으로 축적됩니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는 보다 나은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지요.
예수님은 당신 앞에 다가오는 수난의 시간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지요. 당신이 최종적으로 끌어안은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을 얻게 되었고 당신이 정복한 영원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난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12,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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