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너무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남용한 나머지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되새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석을 너무나도 자주 곁에 두고 바라본 나머지 그 의미에 대해서 무디어지게 된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근본에는 ‘영적 시각의 상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화려한 외부 포장지만 볼 줄 알았지 그 안에 든 것의 실제 가치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나비의 날개짓의 황홀함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고, 어머니가 해 주는 사랑 가득한 밥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서 그 책임감에서 오는 안정감을 굳이 생각하지 않고도 느끼고 즐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유혹이 있었지만 유혹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의 소중한 가치를 저버리고 세상이 주는 달콤한 것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완벽한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유혹에 시달리고 유혹에 빠져본 경험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잃을 위험에 처할 때에 비로소 구원의 가치를 알게 되는 아이러니가 일어납니다. 세상 것에 만취해서 누릴 것을 다 누린 후에 결국 자신에게 주어져 있던 구원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면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습니다. 하지만 만취한 사람이 다들 그렇듯이 토한다고 정신이 없고 다시 새로운 쾌락을 찾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현대인의 일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만취상태입니다. 광고 카피는 계속해서 우리가 세상 것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우리를 붙들어놓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구원의 가치를 담은 저작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우리의 욕구를 증폭시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잠시만 눈을 돌려도 우리는 곧잘 ‘성의 쾌락, 음식의 쾌락, 소비의 쾌락’을 조장하는 것들을 마주하게 되지요. 그것도 아니면 선을 포장한 ‘분노의 요소’를 마주하게 됩니다. 마치 선한 일을 하게 하는 듯이 사람을 분노하고 증오하게 만들지요.
당신에게 있어서 구원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하느님이 내미는 구원을 찾고 있는가요? 아니면 유다가 찾던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상징되는 것을 찾으시는지요? 어쩌면 우리가 찾는 구원은 ‘나만의 구원’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이 제시하는 구원의 가치를 과연 우리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요?
영원을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은 현세에 매이게 됩니다. 구원의 가치를 영원에서 발견하지 못하면 차선책으로 사람들은 현세의 구원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을 ‘어리석음’으로 해석하지요.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교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 근본에는 ‘영적 시각의 상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화려한 외부 포장지만 볼 줄 알았지 그 안에 든 것의 실제 가치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나비의 날개짓의 황홀함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고, 어머니가 해 주는 사랑 가득한 밥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서 그 책임감에서 오는 안정감을 굳이 생각하지 않고도 느끼고 즐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유혹이 있었지만 유혹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의 소중한 가치를 저버리고 세상이 주는 달콤한 것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완벽한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유혹에 시달리고 유혹에 빠져본 경험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잃을 위험에 처할 때에 비로소 구원의 가치를 알게 되는 아이러니가 일어납니다. 세상 것에 만취해서 누릴 것을 다 누린 후에 결국 자신에게 주어져 있던 구원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면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습니다. 하지만 만취한 사람이 다들 그렇듯이 토한다고 정신이 없고 다시 새로운 쾌락을 찾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현대인의 일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만취상태입니다. 광고 카피는 계속해서 우리가 세상 것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우리를 붙들어놓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구원의 가치를 담은 저작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우리의 욕구를 증폭시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잠시만 눈을 돌려도 우리는 곧잘 ‘성의 쾌락, 음식의 쾌락, 소비의 쾌락’을 조장하는 것들을 마주하게 되지요. 그것도 아니면 선을 포장한 ‘분노의 요소’를 마주하게 됩니다. 마치 선한 일을 하게 하는 듯이 사람을 분노하고 증오하게 만들지요.
당신에게 있어서 구원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하느님이 내미는 구원을 찾고 있는가요? 아니면 유다가 찾던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상징되는 것을 찾으시는지요? 어쩌면 우리가 찾는 구원은 ‘나만의 구원’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이 제시하는 구원의 가치를 과연 우리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요?
영원을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은 현세에 매이게 됩니다. 구원의 가치를 영원에서 발견하지 못하면 차선책으로 사람들은 현세의 구원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을 ‘어리석음’으로 해석하지요.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교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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