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습니다. 환영하던 군중들이 폭군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주제는 ‘왜 변했는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반기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변하는 이유는 사실 변해 보이는 것이지 그 내면은 전혀 변하지 않은 셈이지요. 다만 대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 것일 뿐입니다. 겉이 황금으로 칠해져 있는데 속에는 똥이 들어있다면 처음에는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다가 그 실체를 알고는 기분이 상해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구원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요. 그들은 세상의 구원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정치 상황에서 구원해주고 자신들에게 빵을 주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전혀 엉뚱한 말들을 시작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군중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력한 예수님의 모습 앞에서 군중은 돌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는 ‘바라빠’를 선호합니다. 수많은 이들을 살인한 폭력배를 자신의 진정한 구원자 대신에 살려 버리고 예수님은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왜 반길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실체를 알았을 때에 과연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일까요?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만 그분의 영광스런 부활의 모습만을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영광’이라는 것을 세상의 영광과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많은 돈을 벌고, 편안하게 일을 하고, 내가 원하는 식대로 일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요? 우리는 또다른 그 시대의 군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하루 묵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반기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변하는 이유는 사실 변해 보이는 것이지 그 내면은 전혀 변하지 않은 셈이지요. 다만 대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 것일 뿐입니다. 겉이 황금으로 칠해져 있는데 속에는 똥이 들어있다면 처음에는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다가 그 실체를 알고는 기분이 상해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구원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요. 그들은 세상의 구원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정치 상황에서 구원해주고 자신들에게 빵을 주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전혀 엉뚱한 말들을 시작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군중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력한 예수님의 모습 앞에서 군중은 돌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는 ‘바라빠’를 선호합니다. 수많은 이들을 살인한 폭력배를 자신의 진정한 구원자 대신에 살려 버리고 예수님은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왜 반길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실체를 알았을 때에 과연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일까요?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만 그분의 영광스런 부활의 모습만을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영광’이라는 것을 세상의 영광과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많은 돈을 벌고, 편안하게 일을 하고, 내가 원하는 식대로 일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요? 우리는 또다른 그 시대의 군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하루 묵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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