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우리, 그것이 시작점입니다. 먼저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리고 우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둘의 연관관계를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생각만큼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진한 어린이라면 주는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우리는 이미 살아온 배경에 따라 의심을 시작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그런 의심과 거부는 우리 안에 먼저 쌓여진 것에 따라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가 손에 다이아몬드 원석을 쥐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그 보물은 ‘돌조각’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그 손에 쥔 것을 달라고 하면 순순히 내어 놓습니다.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돌멩이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원석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내어 놓으라고 하면 당장에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을 왜 가지려고 하는지, 이미 내 손에 있는 것인데 왜 빼앗으려고 하는지를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그 돌을 꼭 쥐고 절대로 내어놓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순하고 맑은 마음이 필요한데 문제는 이미 우리의 마음이 어느 한 방향으로 굳어 있어서 먼저 그 껍질을 깨고 나서야 그 안에 들어있는 마음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껍질을 쉽게 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롭고 강렬합니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에 그분의 가르침은 이해되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해될 뿐입니다.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서 ‘그저 좋은 분’ 정도로만 이해를 하지 그분을 진정으로 나의 ‘구세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서 걷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변화’를 요구합니다. 변화하지 않고 나의 지식적 욕구만을 채우는 가르침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알아보는 ‘뉴스’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을 지식에 하나 더한다고 해서 그 가르침이 나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나의 삶으로 파고 들어서 나를 변화 시킬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작업을 다시 시도하십니다. 우리의 단단한 마음을 뚫고 들어올 여러가지 요소들을 준비하시고 실행하십니다. 때로는 시련을 전해 주시고,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 은총의 시간도 마련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기보다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것도 우연이요, 저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 것도 우연이요, 모든 것은 아무런 연관성 없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숨어있는 우리를 향한 계획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것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희망을 두시고 다시 당신의 사랑을 쏟아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는 추호의 의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과연 어떠한 것을 바라고 있는지, 우리는 정말 하느님에게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알고나 싶은 것인지. 이런 모든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올바른 방향을 잡도록 하고 그리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결국 나 스스로를 구원으로 이끄는 열쇠는 나 자신이 쥐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열쇠를 들고 전혀 엉뚱한 상자, 세속적 욕구의 상자를 열려고 하고 있으니 결국 될 법한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혀 엉뚱한 곳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다가 생의 대부분을 허비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가 손에 다이아몬드 원석을 쥐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그 보물은 ‘돌조각’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그 손에 쥔 것을 달라고 하면 순순히 내어 놓습니다.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돌멩이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원석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내어 놓으라고 하면 당장에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을 왜 가지려고 하는지, 이미 내 손에 있는 것인데 왜 빼앗으려고 하는지를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그 돌을 꼭 쥐고 절대로 내어놓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순하고 맑은 마음이 필요한데 문제는 이미 우리의 마음이 어느 한 방향으로 굳어 있어서 먼저 그 껍질을 깨고 나서야 그 안에 들어있는 마음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껍질을 쉽게 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롭고 강렬합니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에 그분의 가르침은 이해되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해될 뿐입니다.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서 ‘그저 좋은 분’ 정도로만 이해를 하지 그분을 진정으로 나의 ‘구세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서 걷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변화’를 요구합니다. 변화하지 않고 나의 지식적 욕구만을 채우는 가르침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알아보는 ‘뉴스’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을 지식에 하나 더한다고 해서 그 가르침이 나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나의 삶으로 파고 들어서 나를 변화 시킬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작업을 다시 시도하십니다. 우리의 단단한 마음을 뚫고 들어올 여러가지 요소들을 준비하시고 실행하십니다. 때로는 시련을 전해 주시고,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 은총의 시간도 마련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기보다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것도 우연이요, 저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 것도 우연이요, 모든 것은 아무런 연관성 없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숨어있는 우리를 향한 계획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것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희망을 두시고 다시 당신의 사랑을 쏟아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는 추호의 의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과연 어떠한 것을 바라고 있는지, 우리는 정말 하느님에게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알고나 싶은 것인지. 이런 모든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올바른 방향을 잡도록 하고 그리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결국 나 스스로를 구원으로 이끄는 열쇠는 나 자신이 쥐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열쇠를 들고 전혀 엉뚱한 상자, 세속적 욕구의 상자를 열려고 하고 있으니 결국 될 법한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혀 엉뚱한 곳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다가 생의 대부분을 허비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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