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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50)

사람들이 ‘학위’를 따려는 이유는 그것이 일단 고정된 형태로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학위는 마치 보석과 같습니다. 언제라도 그것을 보유하고 있으면 그것의 고정된 가치를 해 내는 셈이지요. 하지만 진정으로 공부를 즐기는 사람은 매 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도전거리를 즐깁니다. 그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학습하는 것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요. 그에게는 ‘학위’는 상관이 없는 셈입니다. 학위라는 것은 배움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표식에 불과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도 ‘학위’와 같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공인할만한 신앙적 학위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언가에 가입해서 거기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는 것을 자랑스레 여기지요.

단순히 레지오를 참여해서 그 모임 자체의 신앙적 의미를 되새기는 게 아니라, 레지오의 간부가 되고 레지오의 상위 단체에 올라 감투를 쓰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꾸르실료에 들어가서 연수를 받는 것을 마치 아무나 갈 수 없는 해병대 캠프를 다녀온 듯이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파스카 청년 성서 모임에서 보다 상급의 과정을 수료하고 그 연수를 다녀오는 것을 자랑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 그 자체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을 위해서 각종 신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그 프로그램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세상적 이득을 위해서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비슷한 노력으로 같은 명성의 효과를 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 다른 프로그램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실제로 하는 말과 그의 삶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내세우는 ‘외적 표지’를 보고 그를 분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황실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예수님을 가난한 시골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 덕에 오직 진실한 마음을 지닌 이들만이 예수님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이 점지하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은 배경과 출신에 있어서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당신의 예언자를 선발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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