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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용서’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하나는 수산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간음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산나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죄함을 입증하고, 반대로 간음한 여인은 명백히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히 용서를 받습니다.

이는 옛 계약 안에서의 죄에 대한 관념과 새 계약 안에서의 죄에 대한 관념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옛 계약 안에서는 ‘무결함’이 중요합니다. 죄가 없어야 하고 죄가 없음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새 계약 안에서는 ‘용서와 자비’가 중요합니다. 죄가 있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옛 계약의 범주 안에서 살아갑니다. 죄는 단죄하고 무죄함은 풀려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들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살고 무죄한 이들,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은 억압을 당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더욱 ‘억울함’이 쌓여만 갑니다. 도무지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지요. 죄를 지은 그들에게 어떻게든 돌을 던져야 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은 용서하라는 말을 하니 그리스도교는 나약하고 쓸모없는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지요. 하지만 그 처벌을 우리가 사는 동안에 모조리 이룬다는 것은 다른 한 편의 우리의 과욕이고 우리의 미흡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불의를 놓아두지 않는 분이십니다. 제1독서의 수산나의 이야기처럼 하느님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을 들어주시고 그들의 원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범주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넓은 범주일 뿐입니다.

탐욕스런 부자들과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 안에서 어떤 결과가 드러나게 될지 우리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억압 당하는 수많은 의로운 이들이 있지만 그들이 모든 순간을 핍박과 억압 속에서 슬퍼하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마음을 모으고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 이들입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충만함’을 얻게 됩니다.

제1 독서에서 다니엘은 그 두 사악한 노인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자신의 현명함으로 그들을 심문하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노인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음흉한 계략의 덫에 스스로를 묶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나무 이름을 말하면서 스스로를 심판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느님 역시도 우리 모두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의 어두움을 알면서도 ‘기회’를 제공하시지요.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다시 선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집스런 마음’이 늘 그러하듯이 우리 스스로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지요.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최종 결정을 부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기회 마저도 저버리게 된다면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런지 저로서는 상상하기가 힘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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