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 1,16-17)
성경은 ‘선행’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잘 언급해 줍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과연 선행인지를 잘 알려주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선행에 대해서 굉장히 오해를 많이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상’을 제멋대로 정해두고 그 하느님 상에 맞추어 선행을 해석하지요. 하느님의 상은 사람별로 제각각이고 적지 않은 경우에 자신이 오래 몸담아온 생활 습관과 굉장히 연계되어 있으며 부모님의 모습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맞추는 삶’을 살려는 것이 우리의 흔한 모습이지요. 그리고 그 기대라는 것을 지극히 ‘율법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거라고 착각을 하고 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제로 하느님은 전혀 다른 일을 원하는데 말이지요.
금육을 지키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까요? 그건 금육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금육 그 자체보다는 금육을 지키는 그 정신을 중요시하는 분이 하느님이시지요. 만일 금육을 지켜서 ‘의무’를 다해서 양심의 불을 잠재우려는 수준이면 그런 금육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금육만을 지키고 나머지를 다 허용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본체만체 하면서 금요일에 고기가 조금 든 국물은 먹지 않겠다고 나서는 지독히 율법주의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위의 성경구절과 같은 것들입니다. 공정을 추구하는 것, 억압받는 이를 보살피는 것,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과 같은 일들입니다. 물론 이것 뿐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로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박해에 시달린다고 억압받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물질문명’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고, 학교에 다니는 엄마들은 ‘교육열’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직장인은 ‘승진’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고, 젊은이들은 ‘취업’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를 해소한다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것을 모조리 이루어준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게 하여 그들을 깨우치고 본질을 추구하게 도와주는 것이 그들을 억압에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고아들은 부모를 상실한 이들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고아들도 돌보아야 하겠지만, 진정한 고아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이들이지요. 그들의 권리를 찾아준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느님을 다시 아버지로 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고아들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과부는 남편을 잃어버린 이들입니다. 남편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중심이 되는 결정을 하고 가족을 이끌어가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잃은 과부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처가 되는 든든한 존재를 상실해서 막막한 생의 현장에 내던져진 이들이 있지요. 바로 우리 현대인들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되찾아주는 작업,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선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발은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해방을 선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행’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잘 언급해 줍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과연 선행인지를 잘 알려주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선행에 대해서 굉장히 오해를 많이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상’을 제멋대로 정해두고 그 하느님 상에 맞추어 선행을 해석하지요. 하느님의 상은 사람별로 제각각이고 적지 않은 경우에 자신이 오래 몸담아온 생활 습관과 굉장히 연계되어 있으며 부모님의 모습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맞추는 삶’을 살려는 것이 우리의 흔한 모습이지요. 그리고 그 기대라는 것을 지극히 ‘율법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거라고 착각을 하고 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제로 하느님은 전혀 다른 일을 원하는데 말이지요.
금육을 지키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까요? 그건 금육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금육 그 자체보다는 금육을 지키는 그 정신을 중요시하는 분이 하느님이시지요. 만일 금육을 지켜서 ‘의무’를 다해서 양심의 불을 잠재우려는 수준이면 그런 금육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금육만을 지키고 나머지를 다 허용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본체만체 하면서 금요일에 고기가 조금 든 국물은 먹지 않겠다고 나서는 지독히 율법주의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위의 성경구절과 같은 것들입니다. 공정을 추구하는 것, 억압받는 이를 보살피는 것,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과 같은 일들입니다. 물론 이것 뿐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로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박해에 시달린다고 억압받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물질문명’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고, 학교에 다니는 엄마들은 ‘교육열’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직장인은 ‘승진’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고, 젊은이들은 ‘취업’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를 해소한다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것을 모조리 이루어준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게 하여 그들을 깨우치고 본질을 추구하게 도와주는 것이 그들을 억압에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고아들은 부모를 상실한 이들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고아들도 돌보아야 하겠지만, 진정한 고아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이들이지요. 그들의 권리를 찾아준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느님을 다시 아버지로 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고아들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과부는 남편을 잃어버린 이들입니다. 남편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중심이 되는 결정을 하고 가족을 이끌어가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잃은 과부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처가 되는 든든한 존재를 상실해서 막막한 생의 현장에 내던져진 이들이 있지요. 바로 우리 현대인들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되찾아주는 작업,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선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발은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해방을 선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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