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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

신앙생활을 순수하게 내적으로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을 직접 바라보고 그분과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면서 필요한 은총을 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헌데 문제는 하느님 측에서는 우리를 향해서 그것이 가능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계시는데(사랑과 은총을 엄청 부어주시지요.) 우리가 그것을 알아들을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휴대폰 화면이 해상도가 엄청 높아서 지독히 세밀한 것까지 볼 수 있는데 우리 눈이 나빠서 안경을 끼지 않고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과 비슷한 셈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예수님’이라는 안경을 맞추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셨지요. 그리고 그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같은 사명을 남겨 주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교회를 이루게 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이는 표지로 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교회 안의 ‘성사들’입니다.

그래서 성사의 근본은 예수님이며, 교회 또한 성사적 존재이고, 그 교회는 일곱가지의 구체적인 성사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단지 그 표지일 뿐이지 그 근본은 보이지 않는 것이며,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조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전하는 대표적인 수단은 하트(❤︎)표시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트(❤︎)표시를 바라보면서 상대의 사랑을 짐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하트(❤︎)표시 자체가 사랑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하트 표시는 벽에다 그릴 수도 있고, 유리창에다 입김을 불고 적을 수도 있고, 카드나 종이에 적어 줄 수 도 있으며, 휴대폰에 적어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표시들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우리가 진정으로 주고 받게 되는 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지요.

그래서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표시를 한다고 해도 진실한 내면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회는 ‘사효성’이라는 것으로 최소한의 은총을 보장해 두었습니다. 즉, 아무리 마음이 없어도 일단 그 성사적 행위가 이루어지고나면 보장되는 최소한의 것들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이 역시 주의해야 할 것이 혼배 성사에도 ‘무효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나머지 성사들도 애시당초 ‘무효’화가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지극히 소수일 것이고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이 되고 또 형식화, 관습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별 의미 없이 성사를 받는 경우도 점차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같은 상황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이 아직 주류의 움직임이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성사를 받을 때에는 진지하게 받는 경우가 많지만 가톨릭이 국교인 나라, 그리고 그 세례 서류가 주민 등록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에서는 사실 아무런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 필요에 의해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사에 참례할 때에 마음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로 받는 세례, 성체, 견진, 혼인, 고해, 병자의 성사를 받을 때에 온 마음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그 성사적 표지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넘쳐 흐르도록 부어지게 됩니다. 집전자의 열성 또한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그 어떤 사제가 드리는 미사라도 미사는 미사입니다. 그러니 온전한 마음으로 참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 차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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