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죄’를 체험합니다. 바로 서야 할 것이 엇나가는 것이지요. 우리의 자유의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엉뚱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우리의 탐욕이 들어서고, 나눔과 사랑을 배워야 할 자리에 허영과 이기심이 자리잡게 되면 우리는 이미 뒤틀려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들 아이들은 괜찮다고 하면서 살아가지요. 전혀 괜찮은 것이 아닌데도 외적인 모양새가 멀쩡하니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바르게 자라는 나무는 앞으로 많은 것들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닥쳐 오더라도 준비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잘 준비된 도성과도 같아서 어떤 공격이 밀어 닥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적 가치를 심어주는 법을 잊어버렸고(혹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고) 아이들을 그저 현실적인 환경 속에서 원하는 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결과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지요. 가치를 존중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점점 더 늘어가는 셈이고 세상은 그만큼 더 삭막해지는 것이지요. 지식은 뛰어나서 박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저마다 되고 싶은 전문직업인이 되어가지만 결정적으로 내면이 어긋나 있어서 아주 탐욕스러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신앙교육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신앙교육은 ‘책’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리책을 10번 반복해서 쓰게 한다고 신앙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교육은 모범으로 삶으로 여러번의 도전과 실패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짓 교리교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갖추지 못한 채로 다른 이들 앞에 신앙의 교사로 나서는 이들입니다. 그렇다고 겸손함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아는 교육 방법론과 신앙 지식을 바탕으로 아주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모아서 신앙수업을 하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신앙이 전해지지 않는 아주 괴상한 교리 수업이 이루어집니다. 아이들을 닥달해서 원하는 모양새를 갖추기는 하는데 기도문을 외우게 할 뿐 기도를 사랑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앙교육은 교회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가 유전자를 물려받듯이 부모에게서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것입니다. 신심있는 부모, 신앙이 있는 부모는 자신이 가진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물려주려고 하는 부모는 당연히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신앙을 물려주겠지요.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서 신앙을 찾아볼 수 없다고 투덜대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도리어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하고 말이지요. 주일미사 참례를 신앙의 전부로 착각하고 그것도 의무감에 억지로 가면서 과연 그런 신앙을 자녀들이 물려받기를 원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나라도 그런 신앙은 물려받고 싶지 않습니다. 신앙은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기쁨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헌데 억지로 울며 겨자먹기로 그것을 하고 있으면서 그런 신앙이 자녀들에게 물려져 자녀들을 도덕적으로 구속하는 수단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 전달의 방법이 아닌 셈입니다.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가르치고 감시자로 가르치면서 정작 하느님의 가득한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는 소홀하고, 또 정반대로 하느님을 무조건 용서하는 분으로만 가르치면서 합당한 정성과 사랑과 감사를 돌려 드려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여러가지 오류들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을 거지처럼 생각하고 우리가 드리는 봉헌금을 적선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결국 우리 주변의 많은 문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하느님을 하느님의 본래의 자리에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다시 마음을 모으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인지 점검을 하고 뉘우치고 돌아와 가야 할 길을 가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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