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군가의 의견을 들을 때에 그의 말의 옳고 그름을 그 자체로 분별하기는 상당히 힘이 듭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경험 속에서 상대의 말을 분별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남미에 와서 ‘치리모야’, ‘아차차이루’ 등등의 열매를 먹어본 사람과 한국에 살면서 파인애플이나 겨우 먹어본 사람이 열대 과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전혀 다른 이미시 속에서 서로 대화를 하게 됩니다.
특히나 이것이 ‘영적인 진리’에 관련된 내용일 때에는 우리의 눈멀음은 더욱 심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배우려고도 하지 않고 의견을 내어놓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권위’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상대를 분별하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을 대상으로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권위’를 물은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먼저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이야기하게 했지요. 그들은 대답할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도 굳이 그들의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사람은 오랜 시간을 걸쳐서 배움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랜 시간을 걷는다고 부산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KTX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 짧은 시간 안에 더 먼 길을 갈 수 있는 법입니다.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가지 신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태중교우라고 신앙에 대해서 더욱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와 복음적 열정, 그리고 들을 것을 실천하려는 마음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이들이 많고, 반대로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이들이 많고, 반대로 자신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느님 가장 가까이 머무르고 있었던 사람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실은 지극히 피상적인 껍데기만을 인식할 뿐입니다. 참된 현실은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습니다.
특히나 이것이 ‘영적인 진리’에 관련된 내용일 때에는 우리의 눈멀음은 더욱 심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배우려고도 하지 않고 의견을 내어놓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권위’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상대를 분별하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을 대상으로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권위’를 물은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먼저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이야기하게 했지요. 그들은 대답할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도 굳이 그들의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사람은 오랜 시간을 걸쳐서 배움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랜 시간을 걷는다고 부산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KTX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 짧은 시간 안에 더 먼 길을 갈 수 있는 법입니다.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가지 신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태중교우라고 신앙에 대해서 더욱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와 복음적 열정, 그리고 들을 것을 실천하려는 마음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이들이 많고, 반대로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이들이 많고, 반대로 자신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느님 가장 가까이 머무르고 있었던 사람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실은 지극히 피상적인 껍데기만을 인식할 뿐입니다. 참된 현실은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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