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내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양성’이다.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 양성은 말하고 듣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믿음도 결국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다.
우선은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누가 말할 것인가? 말할 것이 있는 사람이 말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여기에서 분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시키는 말을 한다. 자신의 욕구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꾀어내지만 결국에는 엉뚱한 길로 이끌게 된다. 반면, 다른 누군가, 거룩한 분이 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그분에게로 이끌어가고 결국 그들을 살리게 된다.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 청취자들도 이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골라 들은 것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욕구를 바탕으로 듣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는 사실 ‘거룩함에로의 욕구’가 숨어있다. 그래서 화자는 청자를 대할 때에 먼저 그의 욕구가 어디에 기초해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대부분이 이 거룩한 욕구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양성의 무엇보다도 가장 첫 작업은 ‘가려져 있는 거룩한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욕구가 회복되고 나면, 즉 그의 죽은 영이 깨어나고 나면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물론 부드러운 음식부터 시작해야 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외적인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이제서야 영이 일으켜진 사람은 갓난 아기와도 같다.
양성에는 영적인 때(채워지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 편 물리적인 시간(흘러가는 시간)도 필요하다. 어떤 음식이든지 먹자 마자 화장실로 가지는 않는다. 소화가 되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꾸준함도 필요하다. 최초의 교육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지탱해 주는 교육도 굉장히 중요한 법이다. 양성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길어 지난번에 있었던 것을 모조리 잊어버리는 것도 곤란하고 또 너무 잦은 양성으로 지치게 해서도 안된다. 매주의 교육이 가장 적당하다. 주일 미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닌 셈이다.
사실 사제들에게는 최고의 양성시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매주의 강론이다. 우리가 공들여 복음을 바탕으로 준비하는 강론은 신자들에게 최고의 양식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기간 역시 적당하여 꾸준히 말씀을 받아먹는 이들은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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