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로마 2,9)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로마 2,10)
하느님은 죄를 짓는 모든 이가 ‘저절로’ 용서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잘못은 그만큼 뒷걸음을 치는 것이고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대부분의 측정 기준은 외적인 것입니다.
실상 모든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즉 우리 안에 열쇠가 있고 우리 스스로가 그 의지를 어떻게 작동 시키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지요. 헌데 자유의지는 마치 전등 스위치처럼 위로 올리거나 내리거나 하는 간단한 수준의 장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습관이라는 ‘녹’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녹이 슨 자물쇠는 열쇠를 넣고 아무리 돌리려 애를 써도 좀처럼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도 쓰지를 않아서 그대로 녹슬어 버려 내부가 뻑뻑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악에 물든 이가 선을 행하려고 노력을 할 수는 있지만 그 뻑뻑함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서 쉽게 선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회개의 결과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까지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열쇠를 자물쇠에 집어넣을 수는 있지만 자물쇠가 실제적으로 완전히 열리기까지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셈이지요. 어느 순간 사제의 강론을 듣고 신앙을 새롭게 바라볼 수는 있지만 실제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매 순간의 새로운 회개의 노력이 필요한 셈입니다.
이즈음에서 늘 떠오르는 것이 십자가의 우도(右盜)입니다. 그는 죽기 직전에 회개를 했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횡재를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운이 좋아서 죽기 직전에 진정한 회개의 기회를 만나서 예수님 손을 잡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실제적인 면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고집’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번 거부하기 시작하면 죽자고 거부하니까요. 암에 걸려 죽을 고비에 있는 사람이라도 신앙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코웃음을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느님’보다는 ‘의학기술’과 ‘돈’을 더 믿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뉘우칠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낫기만 하면 예전의 화려한 자신의 세속적 생활을 다시 영위할 꿈에 젖어 있는 불쌍한 사람이지요. 십자가의 우도와 같은 죽음 앞의 진정한 회개는 참으로 드문 케이스입니다.
사실 매주의 미사가 그 증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직접 두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믿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허비합니다. 설령 우리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서 같은 죄인으로 만난다고 해서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의 죄없음에 대해서 항변해 줄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교도소에서 그런 비슷한 케이스를 본다면 오히려 고소하다고 욕을 해대는 좌도(左盜) 의 모양새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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