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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 강론


오늘 수녀원 강론에서는 내적인 것을 추구하기를 가르쳤습니다. 마침 제대 앞에 자신들의 창시자 복자 수녀님 사진이 있더군요. 나중에 물어보니 수녀님이 복자품을 받은 기념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보시는 액자는 그림과 나무액자와 유리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자체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지요. 그 안에 상징하는 것이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 그림 안에 담겨진 복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복자를 떠올리고 그분의 성덕과 카리스마(특징지워진 특별한 은총)를 떠올리는 것이지요. 이 액자 자체는 필요에 의해서 소각할 수도 폐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다른 액자가 차지하게 되겠지요. 사실 창시자 수녀님의 모습을 담은 액자는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교회 자체는 그러합니다. 교회의 외적 건물에 집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거룩함을 위해서 헌신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할머니들이 묵주를 들고 모여서 열심히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모습이 훨씬 교회적입니다. 성당을 아무리 드높이 짓고 웅장하게 짓는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적인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수녀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녀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수녀회의 존속과 유지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수녀회가 운영하는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학교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거기에 오는 학생들이 하느님에게 더 쉽게 다가가게 하기 위한 것이지 학교의 존속과 운영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살려고, 안락하게 지내려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하는 영원의 건축물을 지으려고, 그 재료가 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덕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지혜를 다해서 열심히 가르칩니다. 하지만 제가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지 알 도리는 없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식사 자리에서 ‘성소’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한 수녀님이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제가 성소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그 가운데 뜻이 있는 아이들이 몇몇 있어요. 하지만 나머지 아이들의 조소와 야유로 끝나버리곤 하지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수녀님, 무언가를 가르칠 때에는 권위를 지니고 가르쳐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권위라는 것은 그 순간의 엄숙함이 아니라 일찍부터 쌓여져 오는 것입니다. 한 수녀님이 평소에는 엉망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 성소에 대해서 거룩한 척 가르치면 나머지 아이들이 다 그 가식적인 모습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조롱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지만 한 수녀님이 평소에 정말 예수님스런 모습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러는 중에 어느 특별한 시간을 통해서 성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그 시간에 장난을 치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의해서 저지당할 것입니다. 수녀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우리의 평소 생활을 올바르게 다져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수녀님의 말을 진중하게 듣고, 성소의 꿈도 키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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