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천하고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것이 간단히 표현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마땅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 걸까요? 핵심은 하나 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을 실천하고 그것이 아닌 것을 배제하면 됩니다.
그럼 다시 물을 것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입니까?
우리는 가장 기초적인 하느님의 뜻을 내면에 이미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됩니다. 양심이 거부하는 일을 피하기만 해도 우리는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면 안되고 도둑질을 하면 안되고 남이 아파하는 일을 하면 안되고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양심은 무뎌지게 됩니다. 인간이 범죄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양심이 점점 흐려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거짓말이라는 것은 처음에 힘들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 즉 최소한의 규제를 담은 내용들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10계명입니다.
1.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5. 사람을 죽이지 마라.
6. 간음하지 마라.
7. 도둑질을 하지 마라.
8.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이는 인간의 무뎌진 양심이 죄의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라도 다시 하느님에게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양떼를 둘러싼 울타리와도 같은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면 언제나 이리떼들이 득실거리는 곳을 거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셈이지요. 언제 이리에게 공격당해 멸망하더라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마저도 올바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 허다하지요. 사람들은 이 영원한 생명과 직결된 계명들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셈입니다.
인간이 일단 이 계명의 범주 안에 들어서게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방향성은 존재합니다. 즉, 우리 안에 있으면서 목자를 바라보는 양과, 우리 안에 있으면서 여전히 우리 밖을 동경하는 양이 있을 수 있지요.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가 보다 실제적인 차원의 윤리성을 분별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을 하는 일은 좀처럼 생겨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근본 방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야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픈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져들고 나면 하느님을 향한 방향 따위는 점점 생각 속에서 잊혀져가고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려는 방향이 생겨나게 되며, 그 방향은 대부분 하느님이 원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성은 한 번 생겨난다고 고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해 달려가다가도 다시 하느님 아닌 것을 향해 돌아서곤 하며, 반대로 하느님 아닌 것을 향해 있다가도 다시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상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 즉 ‘속도’도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열렬히 원하는 이가 갑자기 돌아서서 세상을 원하는 경우도 좀처럼 없고, 반대로 세상을 향해서 열렬히 달려가는 이가 순식간에 돌아서서 하느님을 원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뭔가 엄청난 계기가 있을 때에 그러한 것이겠지요. 암에 걸리던지,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던지 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엄청난 심적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돌이킬 때에 가능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윤리가 세상의 윤리와 상충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낙태를 금지하는데 세상은 낙태를 해도 괜찮지 않느냐고 하고, 우리는 안락사를 금지하는데 세상은 필요하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생명을 단축시켜 주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합니다.
우리의 윤리의 근거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을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데에서 그 근거를 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낙태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은 ‘효용성’입니다. 경제적 파급 효과를 따져 보거나 산모의 실질적인 삶의 질(영적인 면을 배제한)을 따져 보았을 때에는 아이 하나 정도는 죽여도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지요. 안락사에 대해서도 하느님께서 정하신 수명까지는 살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이고 반대로 자신이 생명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세상의 윤리인 셈입니다.
결정적으로 윤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세상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면’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신,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 깊은 내면에 ‘영적인 면’을 지니고 있고 이 영적인 면의 윤리성이 필요한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상으로서는 이 영적인 면은 존재하지 않는 차원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악의’가 존재하는지 ‘선의’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세상은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한 행동이 타인에게 유익한 것인지, 혹은 타인에게 유해한 것인지만 분별할 수 있을 뿐이지요. 어느 정치가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고아원을 방문하면 미디어들은 그의 외적인 행동을 보고 그에게 찬사를 던질 뿐이지만 실제로 그는 전혀 ‘선함’과는 상관없는 사람인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으로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의 외적인 표지만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론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그분이 세상의 소외된 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윤리적으로 부당한 일이었던 것이지요.
그럼 다시 물을 것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입니까?
우리는 가장 기초적인 하느님의 뜻을 내면에 이미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됩니다. 양심이 거부하는 일을 피하기만 해도 우리는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면 안되고 도둑질을 하면 안되고 남이 아파하는 일을 하면 안되고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양심은 무뎌지게 됩니다. 인간이 범죄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양심이 점점 흐려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거짓말이라는 것은 처음에 힘들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 즉 최소한의 규제를 담은 내용들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10계명입니다.
1.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5. 사람을 죽이지 마라.
6. 간음하지 마라.
7. 도둑질을 하지 마라.
8.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이는 인간의 무뎌진 양심이 죄의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라도 다시 하느님에게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양떼를 둘러싼 울타리와도 같은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면 언제나 이리떼들이 득실거리는 곳을 거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셈이지요. 언제 이리에게 공격당해 멸망하더라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마저도 올바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 허다하지요. 사람들은 이 영원한 생명과 직결된 계명들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셈입니다.
인간이 일단 이 계명의 범주 안에 들어서게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방향성은 존재합니다. 즉, 우리 안에 있으면서 목자를 바라보는 양과, 우리 안에 있으면서 여전히 우리 밖을 동경하는 양이 있을 수 있지요.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가 보다 실제적인 차원의 윤리성을 분별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을 하는 일은 좀처럼 생겨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근본 방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야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픈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져들고 나면 하느님을 향한 방향 따위는 점점 생각 속에서 잊혀져가고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려는 방향이 생겨나게 되며, 그 방향은 대부분 하느님이 원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성은 한 번 생겨난다고 고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해 달려가다가도 다시 하느님 아닌 것을 향해 돌아서곤 하며, 반대로 하느님 아닌 것을 향해 있다가도 다시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상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 즉 ‘속도’도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열렬히 원하는 이가 갑자기 돌아서서 세상을 원하는 경우도 좀처럼 없고, 반대로 세상을 향해서 열렬히 달려가는 이가 순식간에 돌아서서 하느님을 원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뭔가 엄청난 계기가 있을 때에 그러한 것이겠지요. 암에 걸리던지,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던지 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엄청난 심적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돌이킬 때에 가능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윤리가 세상의 윤리와 상충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낙태를 금지하는데 세상은 낙태를 해도 괜찮지 않느냐고 하고, 우리는 안락사를 금지하는데 세상은 필요하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생명을 단축시켜 주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합니다.
우리의 윤리의 근거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을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데에서 그 근거를 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낙태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은 ‘효용성’입니다. 경제적 파급 효과를 따져 보거나 산모의 실질적인 삶의 질(영적인 면을 배제한)을 따져 보았을 때에는 아이 하나 정도는 죽여도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지요. 안락사에 대해서도 하느님께서 정하신 수명까지는 살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이고 반대로 자신이 생명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세상의 윤리인 셈입니다.
결정적으로 윤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세상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면’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신,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 깊은 내면에 ‘영적인 면’을 지니고 있고 이 영적인 면의 윤리성이 필요한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상으로서는 이 영적인 면은 존재하지 않는 차원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악의’가 존재하는지 ‘선의’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세상은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한 행동이 타인에게 유익한 것인지, 혹은 타인에게 유해한 것인지만 분별할 수 있을 뿐이지요. 어느 정치가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고아원을 방문하면 미디어들은 그의 외적인 행동을 보고 그에게 찬사를 던질 뿐이지만 실제로 그는 전혀 ‘선함’과는 상관없는 사람인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으로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의 외적인 표지만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론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그분이 세상의 소외된 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윤리적으로 부당한 일이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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