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1,42)
의롭다는 것은 모든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 연인이 사랑할 때에는 상대가 하는 모든 행동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심지어는 코를 파고 방구를 껴도 그 모습이 재밌기만 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이 식고 다른 이를 향한 애정이 시작되고 나면 그가 하는 모든 정상적인 행동마저도 괜히 거슬리게 됩니다.
우리는 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의로운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적지 않은 오늘날의 가톨릭 신앙인들이 이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선하고 의로워보이는 행위를 유지한다고 해도 그 내면이 썩어 있는 셈이 됩니다.
한번은 대구 성모당에 당시에 이름만 대면 다 알 것 같은 보수파 정치인이 출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짐짓 거룩한 듯이 성모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척’을 했습니다. 당연히 때는 선거때였습니다. 물론 그 뒤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그의 목적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분명 다른 것이었지요.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신심 있고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지키는 행위들은 그 내적 가치를 기준으로 분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함부로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별마저 그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맺는 열매로 그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거짓 위선과 외적인 면에 치중해서 부풀려진 헛된 가식을 조심하라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어찌될지 함부로 결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고 조심할 필요는 있습니다.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무시하면서 외적인 것에만 치중을 해서 다른 이들을 억누르는 이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1,4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