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신앙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신앙이 기틀이 되지 않고 바탕이 되지 않으면 나머지 그 어떤 것을 쌓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누구이시고 어떻게 그분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쳤지요.
주보를 하나 구해와서 뒤에 물건을 하나 숨기고는 교리교사 중의 한 명에게 이게 뭔지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사는 그건 ‘주보’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 뒤에 숨긴 물건은 죽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것을 본 저만이 그 교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었지요.
만일 누구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면 그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무도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보신 분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그리고 그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교회를 이루시고 당신의 사도들을 통해서 당신이 아시는 하느님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계자들이 이어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아무리 하느님을 보셨다고 해도 그 가르침을 전해받은 제자들이 입을 닫으면 하느님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선교’라는 것은 옵션이 아니라 기본 사명입니다. 선교가 일종의 운동이 되어서 관심있는 사람이나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선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신앙인들, 심지어는 교회 안의 봉사자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와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아직 교회를 통해서 얻을 게 있고 받을 게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지요. 그것은 권력일수도, 명예일수도,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에는 가장 먼저 신앙을 내팽겨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앙은 어떻게 지닐 수 있는 것일까요? 그저 신앙적인 지식을 머릿속에 채우기만 하면 신앙이 생긴 것일까요? 아닙니다. 신앙은 신앙을 살 때에 비로소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간 아이가 밑에 서서 뛰어 내리라고 하는 아빠를 믿는다면 뛰어내릴 것이고, 믿지 못한다면 뛰어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참된 것들을 추구하라고 가르치고 우리는 그 아버지를 믿지 못해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들에게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향해 나서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아니, 오히려 반대로 신앙을 드러내어야 할 때에 우리는 겁쟁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용기를 지니라는 것이 무모해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용기와 무모함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용기라는 것은 부족한 의지를 꺼내어 일을 완수하는 것이고 무모함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대놓고 나서서 깨지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의 행동이 무모함이 아니었던 이유는 바로 뒤에 하느님의 전능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신뢰 없이 어린 것이 적 장수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무모한 행동에 불과했을 테지요.
신앙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겁내지 말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것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지 걱정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주보를 하나 구해와서 뒤에 물건을 하나 숨기고는 교리교사 중의 한 명에게 이게 뭔지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사는 그건 ‘주보’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 뒤에 숨긴 물건은 죽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것을 본 저만이 그 교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었지요.
만일 누구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면 그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무도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보신 분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그리고 그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교회를 이루시고 당신의 사도들을 통해서 당신이 아시는 하느님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계자들이 이어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아무리 하느님을 보셨다고 해도 그 가르침을 전해받은 제자들이 입을 닫으면 하느님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선교’라는 것은 옵션이 아니라 기본 사명입니다. 선교가 일종의 운동이 되어서 관심있는 사람이나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선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신앙인들, 심지어는 교회 안의 봉사자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와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아직 교회를 통해서 얻을 게 있고 받을 게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지요. 그것은 권력일수도, 명예일수도,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에는 가장 먼저 신앙을 내팽겨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앙은 어떻게 지닐 수 있는 것일까요? 그저 신앙적인 지식을 머릿속에 채우기만 하면 신앙이 생긴 것일까요? 아닙니다. 신앙은 신앙을 살 때에 비로소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간 아이가 밑에 서서 뛰어 내리라고 하는 아빠를 믿는다면 뛰어내릴 것이고, 믿지 못한다면 뛰어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참된 것들을 추구하라고 가르치고 우리는 그 아버지를 믿지 못해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들에게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향해 나서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아니, 오히려 반대로 신앙을 드러내어야 할 때에 우리는 겁쟁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용기를 지니라는 것이 무모해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용기와 무모함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용기라는 것은 부족한 의지를 꺼내어 일을 완수하는 것이고 무모함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대놓고 나서서 깨지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의 행동이 무모함이 아니었던 이유는 바로 뒤에 하느님의 전능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신뢰 없이 어린 것이 적 장수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무모한 행동에 불과했을 테지요.
신앙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겁내지 말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것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지 걱정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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