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복음에 나오는 행복선언은 여전히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누가 가난해지기를 바라고, 세상 누가 슬퍼하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기를 자처하고, 나아가 모욕을 당하고 온갖 사악한 말을 듣기를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본성 안에는 그런 것을 향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쉬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급스런 취미 활동을 하고 더 힘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밥을 먹어도 레스토랑에서 고급진 음식을 먹고 걱정 고민이 하나도 없는 행복한 나날을 일상적으로 보내야 성이 차는 상황에 예수님의 말씀은 정반대 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옛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고 새 인간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옛 인간의 상태에 남게 되고 새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 인간은 죄에 얽매인 인간입니다. 죄에 얽매였다고 하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간단한 예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는 그 거짓말이 탄로날 것이 두려워서 진실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거짓말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이 마음 안에 족쇄를 채워서 보다 큰 선을 향한 발걸음을 가로막는 것이지요. 인간이 이렇게 악의 영향력 안에 놓이게 되면 선을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묶인 악 안에서 기쁨을 찾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 기쁨들은 바로 세상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아닌 세상의 자녀들은 세상의 기쁨을 열렬히 추구합니다. 그것 말고는 남은 기쁨이 없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우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그런 기쁨을 누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두고 함께 즐길 줄 알고, 좋은 여행지로 피서를 갈 수도 있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세상의 자녀들은 그것에 집착하는 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것을 누릴 뿐입니다. 있으면 누리고 없으면 없는 대로 뜻이 있겠거니 하고 사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의 본질적인 기쁨은 세속적 쾌락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면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살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면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것들이지요. 내가 거룩하고 선한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있는지, 아니면 세속적인 쾌락에만 집착을 하고 있는지 누구나 잠시 머물러 생각에 잠겨보면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바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없게 되고 하던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지요.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주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을 켤 줄은 알지만 묵상하기 위해서 5분을 투자할 수는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둔한 정신으로 늘 하던 것을 반복하고 말지요.
깨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본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깨어날 수 있고 깨어나야 합니다. 모든 행복의 출발점은 외적 환경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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