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오늘 복음에서는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지금의 악한 세대를 단죄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남방 여왕은 지혜를 찾아다닌 사람입니다. 보다 더 나은 지혜를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지요. 그러다가 결국 솔로몬 왕에게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참된 지혜를 위해서 찾다가 찾다가 결국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이에게까지 이른 것이지요. 사람은 진정한 현명한 길을 찾다가 보면 결국 예수님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지혜를 찾는 이는 결국 예수님의 지혜 앞에 잠시 머무르게 되지요. 그리고 그분의 지혜를 거부할 수 없게 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한 백성’입니다. 그들은 악한 생활을 유지해 오다가 요나 예언자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돌이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하느님 앞에 돌아왔지요. 바로 이 회개가 그들에게 은총으로 작용을 했고 그들이 지금의 세대를 단죄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생각을 거꾸로 해 봅시다. ‘악한 세대’가 의미하는 것은 지혜를 갈구하지도, 뉘우칠 줄도 모르는 세대를 의미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표징’을 찾아다니는 세대를 말하지요. 참된 지혜가 없으니 그들은 어리석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참으로 천박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지요. 거기에 뉘우칠 줄도 모릅니다. 자신이 어떤 오류에 있는지 인식조차 잘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뉘우치기보다는 도리어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대들기가 일쑤입니다. 나아가 ‘표징’에 굶주려 있습니다. 뭐든 이상하다 싶은 현상에는 기를 쓰고 모여듭니다. 그리고 그 표징을 신주단지 떠받들듯이 하지요.
대표적인 케이스로 ‘나주 율리아를 신봉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본 길에서 멀이 떨어져 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상처받고 증오에 가득한 이들이 많고 그것을 대체할 수단으로 교계제도를 비판하는 예언의 말씀을 찾아다니는 이들이지요. 거기에다가 스스로 뉘우칠 줄도 모릅니다. 자기 스스로를 가장 완전한 의인이고 가장 완전한 지성인으로 분별하는 이들이지요. 나아가 그들이 신봉하는 표징이라는 것을 수호하기 위해서 이만 저만 난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대표적인 케이스를 제외하고라도 일반 가톨릭 신자들 안에서도 이런 종류의 모습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명예와 인기를 갈구하는 구역장이라던가, 신앙 진리를 가르치는 데에 헌신하기보다 교사들의 회식자리를 즐기는 교리교사라던가, 화려한 취미생활에 골몰해 있는 세속적 성직자라던가, 사목자의 권위를 탐내는 교만한 수도자와 같이 얼마든지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악한 세대에 편입되지 않도록 예언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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