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죄와 은총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 5,20-21)

우리의 마음은 마치 흙으로 빚어지고 있는 뚜껑이 있는 그릇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넓힐 수도 있고 또 반대로 극도로 좁게 만들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을 것을 골라서 뚜껑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있지요.

이 내면의 상황은 어느 한 가지 조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참 다이나믹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서 그릇의 내면이 넓어지기도 하고, 또 반대로 좁아지기도 합니다. 우리 내면의 성향, 추구하는 방향, 원의의 강도 등등이 모조리 작용해서 정말 복잡다단한 것을 이루어내지요. 하지만 신앙 안에서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그 핵심 주제입니다. 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어떤 특정의 종교색을 띄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단순히 성경을 들고 다닌다고 신앙을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교적을 만들었다고 그것으로 완전한 신자가 된다고 착각해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의 영혼을 통해서 내가 받아들이는 것을 그대로 흡수하고 따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담배를 태우지 않는 사람이 잠시 누군가가 맡겨놓은 담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흡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담배는 스스로 태울 줄 알아야 하는 것이고 또 온전한 흡연자가 되기 위해서는 담배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지요. 단순히 연기를 한 번 들이켰다고 그 즉시 흡연자가 되지도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내면을 서서히 키우게 됩니다. 신앙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내면이 커지지 않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우리에게 인내와 겸손을 통해서 보다 깊은 내면에 이르도록 늘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가장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이는 누구나 그 하느님을 내면에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게 되고 그만큼 더 깊은 내면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성경 구절을 묵상해봅시다.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고 합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후벼파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내면을 어지럽히게 되지요. 죄를 짓는 사람은 신앙을 지닌 사람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고뇌를 많이 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그만큼 그 내면에 죄를 많이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부풀어오르는 풍선과도 같습니다.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풍선은 부풀어 오르게 마련이지요.

헌데 그런 그가 어느 순간 ‘회개’를 체험하게 되면 참으로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안의 모든 어두움이 빠져나가고 다시 은총이 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면 됩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 이들을 최선을 다해서 박해하다가 정반대로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어 버린 사람입니다. 그가 악을 저지르기 위해서 사용해했던 모든 열정이 정반대로 복음화의 도구로 쓰이게 된 것이지요.

죄가 많은 곳이지만 언제라도 방향을 바꾸면, 즉 회개를 이루어내면 그 모든 것에 은총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구원된 존재들이고 우리 안에는 죄에서 기인하는 죽음이 지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지요.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