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치 구원이라는 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잖아. 언제든지 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실거야.’라는 생각이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엄청난 것이라서 그 어떤 죄를 지은 이라도 진정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가 진정으로 뉘우쳤는가 아닌가를 하느님이 생각 외로 보다 진지하게 검토하신다는 것이지요.
잘못했다고 말한다고 해서 뉘우친 것이 아닙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그 잘못했다는 표현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미사 직전에 와서 지난 주에 미사를 빠졌다고 고해하는 이가 과연 정말 자신의 주일을 거른 행동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내면에는 ‘어쩔 수 없었는 걸 뭐, 성사보면 끝이지.’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번에 같은 상황을 만나면 언제라도 가장 우선적으로 미사를 포기할 사람인 셈이지요.
우리가 하는 적지 않은 고해성사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뉘우칠 마음이 없으면서 어떻게든 그 순간을 모면해 보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가 엉뚱하게 소모되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자비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전해지지 않고 엉뚱하게 뉘우칠 마음이 전혀 없는 이에게 자비가 소모되고 있지요. 물론 하느님의 본질적인 은총은 소모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때가 이르러 가장 필요한 이에게 반드시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자비를 소홀히 다룬 이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매번 그런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무디어져 간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서히 메말라갈 것이며 세상에 사로잡혀 가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신앙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훌륭한 가톨릭 신자라고 착각하고 지낼 것입니다.
환부가 통증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데도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인 명입니다. 영혼이 목말라 울부짖는데 거기에 합당한 생명의 음식과 음료를 마련하지 않고 엉뚱한 탐욕의 결과물을 쏟아붓는 자는 훗날 죽어버린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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