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간 수녀원 미사에는 그 수녀회의 총장 수녀님이 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분이었지요. 마침 복음도 적절한 것이 있어서 열심히 강론을 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복잡한 것 같아 보입니다. 온갖 계명들과 법규들이 난무하지요. 하지만 원리는 지극히 간단한 것입니다. 바로 1독서에 잘 나와 있지요.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헌데 문제는 우리 인간이 내면에 지닌 그 방향성을 속이고 겉으로 가식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음험하고 음침하고 부정적이고 악한 내면을 지니고 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띄우고 착한 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수도복을 입고 나다닐 수도 있지요. 그런 이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것과 분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입니다. 심판하는 것은 그의 결과를 미리 결정지어 그가 완전히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해 버리는 것을 말하고, 분별하는 것은 그의 현재 상태를 올바르게 살펴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것을 말합니다. 즉, 분별은 그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고 심판은 그를 끝장내기 위한 것이지요.
장상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이 분별을 올바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심판하지는 말아야 하지요. 심판하는 이는 상대를 향한 증오에 휩싸이게 됩니다. 하지만 분별하는 이는 상대를 향한 연민에 휩싸이게 되지요. 우리 총장 수녀님은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은 금물입니다.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 2,1-2)
올바른 분별을 하는 이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반응과 비슷하지요.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을 분별하고 그들에게 경고를 할 때에 율법 학자들이 나섭니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루카 11,45)
그들이 이런 말을 한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를 모독하는 것이 되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나서서 사람들을 선동해서 당신을 증오하게 할 수도 있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의견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에게 당신이 가르쳐야 할 바를 충분히 가르칩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1,46)
장상의 일을 맡게 되면 올바른 분별이 필요할 때가 많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불평을 털어놓게 될 것이고 장상에 대한 악평을 늘어놓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 총장 수녀님도 두려움 없이 맡은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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