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의 어둠을 대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있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인정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뉘우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앞에 두고 도리어 뻔뻔하게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취급하는 사람입니다.
때로 이 후자를 만나게 되면 그들의 뻔뻔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뉘우치는 모양새가 아니라 비록 그런 짓을 했어도 자신은 사실 천사와 같은 사람이며 그 잘못의 탓은 자신이 아닌 주변에 모두 탓이 있다고 둘러대는 사람입니다.
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일 서너살 짜리 아이가 도둑질에 대한 개념이 없이 좋아 보이는 물건을 집어드는 것과 사춘기의 아이가 도둑질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타인의 물건이 탐이 나서 슬쩍 하는 것은 명백한 차이가 있는 행위이지요. 전자는 죄라고 하기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나의 것과 남의 것에 대한 개념이 뭔지 잘 모르기 때문이지요. 부모님은 사랑과 애정으로 그 아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반면 후자는 명백한 죄입니다.
죄를 짓고 그것이 발각되면 수치스럽게 마련이고 따라서 그 수치를 견디기 힘이 들어서 최대한 감추고 숨어들고 싶은 마음은 사실 정상적인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런 약함을 방치하고 결국 그 잘못은 다시 반복하기에 이르게 되면 양심은 점점 굳어지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이르는 뻔뻔함도 일순간에 나오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주 작은 소홀함을 방치하기 시작하는 데에서 위중한 내적 흐름이 형성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내 안에 고정된 어둠으로의 방향성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단순히 도벽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기, 증오, 탐욕, 나태, 거짓, 중상, 모함 등등의 모든 내적 흐름과 행위들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악이 형성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나아가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할 줄 아는 용기를 지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위중한 사안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하다가는 결국 그 악의 씨앗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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