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히브 2,10)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완전함에 이르는 길은 ‘고난’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의미없는 고통이 아니었지요.
우리는 삶에서 이러저러한 고난을 마주합니다. 간단하게는 성장하는 데에 필요한 육체적 고통부터 시작해서, 학업에 정진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신적 고난, 그리고 숨겨져 있는 영적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들이 우리 삶 안에서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부부가 사랑한다면 현실적인 여러 어려움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부는 온전한 사랑의 일치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부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주 사소한 문제도 크게 확장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고통은 ‘영적인 고통’입니다. 바로 그 영적인 고통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양산이 되고, 육체적인 고통도 가중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하는 영적인 고통,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데에서 오는 영적인 고통, 그것이 우리를 조금씩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익숙해져 가야 합니다. 아무 말도 없으시고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필요한 것이지요. 믿음 안에서 겪는 고난은 인내를 성장시키고 인내 속에서 희망을 간직하고 일상의 사랑의 행업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하신 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추상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를 겪는 이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대기업에 들어가고, 전문직을 통해서 엄청난 돈을 벌고, 멋진 배우자를 얻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아라.’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겪으신 분을 따라서 자진해서 고난을 겪겠다고 나서는 이들이지요. 일상의 고통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 영광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고난’은 필수적인 요소인 셈이지요.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완전함에 이르는 길은 ‘고난’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의미없는 고통이 아니었지요.
우리는 삶에서 이러저러한 고난을 마주합니다. 간단하게는 성장하는 데에 필요한 육체적 고통부터 시작해서, 학업에 정진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신적 고난, 그리고 숨겨져 있는 영적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들이 우리 삶 안에서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부부가 사랑한다면 현실적인 여러 어려움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부는 온전한 사랑의 일치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부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주 사소한 문제도 크게 확장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고통은 ‘영적인 고통’입니다. 바로 그 영적인 고통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양산이 되고, 육체적인 고통도 가중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하는 영적인 고통,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데에서 오는 영적인 고통, 그것이 우리를 조금씩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익숙해져 가야 합니다. 아무 말도 없으시고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필요한 것이지요. 믿음 안에서 겪는 고난은 인내를 성장시키고 인내 속에서 희망을 간직하고 일상의 사랑의 행업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하신 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추상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를 겪는 이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대기업에 들어가고, 전문직을 통해서 엄청난 돈을 벌고, 멋진 배우자를 얻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아라.’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겪으신 분을 따라서 자진해서 고난을 겪겠다고 나서는 이들이지요. 일상의 고통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 영광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고난’은 필수적인 요소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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