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7)
옳고 그르다는 기준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요?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정말 옳고 그름을 모르는 것일까요?
1+1=2
위의 수식은 정확한가요? 그렇습니다. 위의 수식은 정확합니다. 올바르게 계산된 수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수학적 진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지성 안에서 올바른가 아닌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닌지를 밝혀내고 그것이 올바로 묘사되었는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옳고 그름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사실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일종의 내적 방향성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
이는 옳은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된다 등등 여러가지가 있지요. 이는 우리 안에 내재된 일종의 방향성에 기초합니다.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분별은 이 양심에 기본적으로 기초하지만 그것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역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옳고 그름의 척도는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그 내면 안에 방향을 심어 주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은 ‘하느님’에게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합당한 일이 올바른 일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에게 어긋나는 일은 아무리 우리 눈에 합당하게 보이더라도 어긋난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이를 분별하는 것은 참으로 미묘한 작업입니다. 이는 인간의 지성을 모아서 분별한다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분별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양심은 엇나가기도 합니다. 이미 범죄에 몸담은 사람은 작은 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실제로 수많은 이들은 성적 윤리나 기본적인 도덕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윤리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쳐도 실제는 다르고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게 무뎌진 양심은 거짓말도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되고, 심지어는 필요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도 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지요.
우리는 올바른 일을 분별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하느님에게 기대어야 하는데 그것도 할 줄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기도와 성찰의 시간은 엉뚱한 세상 소식이 꽉꽉 채우고 말지요. 누구든지 연예인 기사는 알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알아도 정작 자신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사실입니다.
올바른 방향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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