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참되다는 것, 옳다는 것 말이지요.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기준에서 진리의 말을 선택하게 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진리는 ‘사실여부’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이지요. 바로 이 기초적인 진리성의 여부에 사람들은 그만 정착하고 맙니다. 그것이 사실이면 그만인 것이지요. 헌데 안타깝게도 여기에서 많이들 속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떠벌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의 진리 여부가 개입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진리인 이유는 사실성에 대한 것 자체보다도 그 내면의 진리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셨고 그분의 말씀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영원히 진리일 뿐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것을 말씀하셨다가 그것을 수정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는 오직 진리의 말만 나올 뿐입니다.
과연 내면의 진리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경우를 떠올려봅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했습니다. 손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고쳐준 것이지요. 만일 그 사실여부만을 따지고 본다면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이 있고 그 율법조항에 어긋나는 행동을 예수님이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면에서 예수님은 법을 어긴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악인들의 진리인 셈입니다. 그들은 사실여부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진리는 사실여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면의 진리를 간직하신 분입니다. 태초부터 정해지고 바뀌지 않는 진리, 그것은 바로 ‘사랑’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그 행동을 한 기초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고통을 보셨고 그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사랑의 행위이었고 하느님 앞에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행위인 것입니다. 오히려 추악한 것은 사실을 근거로 예수님을 공격하려는 음모에 뒤덮인 주변 인물들의 속내였지요. 그들은 사실만을 쥐고 그 사실을 이용해서 진리이신 분을 공격하려고 들었던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진리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저 사실관계나 알아볼 뿐이지요. 이미 누군가에 대해서 쑥덕거리고 있는 그 모양새 자체가 진리에 어긋나는 짓일 뿐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 사실이라고 굳게 믿을 뿐이지요. 그래서 빌라도 역시 예수님을 앞에 두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이지요.
진리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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