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일을 마치고 쉬십니다. 그리고 그 날을 축복하십니다. 우리 주일의 기원이 되는 날입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토요일이 그 날이라고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그 날의 의미를 일요일로 옮겨서 주일을 지냅니다.
주일은 휴식과 축복의 시간입니다.
휴식을 무시하는 것, 또 무조건 쉬려고 하는 것, 그리고 축복의 시간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휴식을 무시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반드시 휴식이 필요한데도 일주일 내내 무리하게 기계를 돌리니 무리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다음으로 드러난 모습은 ‘지나친 휴식’입니다. 휴식이라는 의미를 무조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무리하게 이런 저런 여가활동을 시도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심지어는 주일미사조차도 거부하면서 휴식을 찾겠다고 나서는 게으른 사람이 나타나게 되고, 또 휴식의 진정한 의미를 찾겠다고 하면서 일보다 더 힘든 여가활동을 추구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술도 마찬가지이니 몸을 상해 가면서 술자리를 가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특히 가톨릭 교회 내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술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종 모임마다 회식을 하고 우리는 개신교가 아니니 마치 술은 얼마든지 마셔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예수님도 포도주를 나누셨지만 예수님이 진탕 마시고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라는 표현이 성경 안에서 등장한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절제’가 없었다고 억측하는 것은 순전히 억지일 뿐입니다.
휴식에 대한 진정한 의미, 그것은 육과 정신과 영의 휴식입니다. 육신은 적절한 휴식을 취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정신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그 내면에서 깊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휴식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영혼이 쉴 자리는 ‘하느님’ 뿐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영혼은 어딜 가도 휴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 영혼의 휴식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영혼이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면 기쁨에 가득찹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태중에서 만난 것과 마찬가지이죠.
하지만 우리의 미사는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미사 때문에 힘들다고 하고, 미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미사를 단순히 육신과 정신으로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쉬러 오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성당에 그 어떤 정신활동도 없이 편안함을 추구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하느님과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 미사에 나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육신과 정신이 필연적으로 활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모르는 수많은 이가 ‘나는 성당 안간다. 가서 도대체 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참된 휴식의 의미를 회복해야 합니다. 만일 주일을 쉴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라면 주일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주중에 쉬는 날을 택해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생각만큼 째째한 분이 아니니 그 사람에게 축복을 가득히 내리시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주일미사를 참례할 환경을 훗날 마련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느님은 시간을 축복하셨습니다. 주일의 참된 의미를 누리는 신자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주일은 휴식과 축복의 시간입니다.
휴식을 무시하는 것, 또 무조건 쉬려고 하는 것, 그리고 축복의 시간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휴식을 무시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반드시 휴식이 필요한데도 일주일 내내 무리하게 기계를 돌리니 무리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다음으로 드러난 모습은 ‘지나친 휴식’입니다. 휴식이라는 의미를 무조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무리하게 이런 저런 여가활동을 시도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심지어는 주일미사조차도 거부하면서 휴식을 찾겠다고 나서는 게으른 사람이 나타나게 되고, 또 휴식의 진정한 의미를 찾겠다고 하면서 일보다 더 힘든 여가활동을 추구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술도 마찬가지이니 몸을 상해 가면서 술자리를 가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특히 가톨릭 교회 내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술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종 모임마다 회식을 하고 우리는 개신교가 아니니 마치 술은 얼마든지 마셔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예수님도 포도주를 나누셨지만 예수님이 진탕 마시고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라는 표현이 성경 안에서 등장한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절제’가 없었다고 억측하는 것은 순전히 억지일 뿐입니다.
휴식에 대한 진정한 의미, 그것은 육과 정신과 영의 휴식입니다. 육신은 적절한 휴식을 취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정신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그 내면에서 깊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휴식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영혼이 쉴 자리는 ‘하느님’ 뿐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영혼은 어딜 가도 휴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 영혼의 휴식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영혼이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면 기쁨에 가득찹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태중에서 만난 것과 마찬가지이죠.
하지만 우리의 미사는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미사 때문에 힘들다고 하고, 미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미사를 단순히 육신과 정신으로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쉬러 오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성당에 그 어떤 정신활동도 없이 편안함을 추구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하느님과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 미사에 나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육신과 정신이 필연적으로 활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모르는 수많은 이가 ‘나는 성당 안간다. 가서 도대체 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참된 휴식의 의미를 회복해야 합니다. 만일 주일을 쉴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라면 주일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주중에 쉬는 날을 택해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생각만큼 째째한 분이 아니니 그 사람에게 축복을 가득히 내리시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주일미사를 참례할 환경을 훗날 마련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느님은 시간을 축복하셨습니다. 주일의 참된 의미를 누리는 신자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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