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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분별하실 일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에제 18,28)

회개와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라치면 단골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영화 ‘밀양’의 한 장면입니다. 큰 맘 먹고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가서 용서를 하려 했더니 자신은 이미 회개를 했고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그 장면에서 관객들은 큰 충격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묘사되는 종교 자체에 반감을 품게 되는 것이지요. “당사자가 용서하지 않은 일을 도대체 누구에게 용서받았다는 말인가? 그 예수라는 작자는 도대체 뭔가?”라는 식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장면에만 주목한다면 그런 반응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전도연은 자녀를 잃은 천사이고 그 범인은 살인마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장면을 보는 누구나 분노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실제는 보다 더 큰 그림 속에서 그려집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반대의 일도 언급하고 있으니 아무리 의인이라도 돌아서서 죄악에 빠져들면 그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인가 하는 것이 질문이 될 것입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그리고 죄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쉽게 나와 너를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인 구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남을 향해 삿대질을 할 때에는 그는 무조건 죽을 죄인이고 나는 반대로 천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쉽사리 우리 자신의 진실한 모습에 대해서 망각하고 맙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어느 사건을 바탕으로 나라를 분별하기 시작하면 우리나라는 무조건 천사와 같은 나라이고 상대 국가는 백번 죽어 마땅한 나라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외국에 저지른 악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날엔 우리는 혼란스러워하는 것이지요.

완벽한 죄인은 없습니다. 완벽한 의인도 없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살아갑니다. 나아가 나에게는 좋은 것이라도 상대에게는 나쁠 수 있고, 내가 싫은 상대의 어떤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나에게 닥칠 때에 나에게 좋은 것은 다 좋아 보이고, 나에게 싫은 것은 다 나빠 보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표현된 사건과 같은 일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면은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지요. 다만 우리 신앙인은 그러한 일이 닥쳤을 때에 판단을 하느님에게 맡길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사랑하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여러분들이 하느님이 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많은 경우에 실수를 하게 됩니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알 수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의인으로 살던 이도 악인으로 죽을 수 있고, 악인으로 살던 이도 의인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성’을 열어두고 열심히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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