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세6,5-6)
창세기의 노아의 이야기 앞부분의 간략한 설명입니다.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후회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언뜻 하느님의 ‘절대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아니,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모든 힘을 지니신 분이 ‘후회’할 일을 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드는 생각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완벽함에 대한 규정을 상당히 그릇되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돌덩어리’에서 완벽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존재, 모든 것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절대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완벽’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완벽일까요?
실제로 그러한 완벽을 유지하고 살아가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긋나 있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아주 차가운 돌처럼 굳어져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아주 냉정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성요셉이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성요셉 성인이 그렇게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동정 마리아는 이미 돌을 맞고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율법대로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요셉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요. 그것이 진정한 완벽성입니다. 영적 완벽성이지요. 더 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유의지’를 나누어 주셨지요. 그리고 그 자유를 통해서 당신을 사랑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을 그릇되이 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악을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고 창조된 세상을 망쳐놓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전능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 극진해서 일어난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설명을 듣고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이 역동적 사랑의 흐름을 그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면서도 노아를 남겨 두셨습니다. 이 말은 노아에게 아무런 흠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흠 없는 인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나마 나은 노아를 하느님이 선택하신 것일 뿐이지요.
사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세례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인간 존재가 세례의 물로 씻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살아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비둘기가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왔듯이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함은 여전합니다. 지금의 세상은 하느님의 전능함 속에서 움직여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왜 악을 깡그리 없애지 않느냐?’고 대들어봐야 소용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반대로 그 가운데에서 선한 이들이 더욱 강해 지기를 바라시고 계시니까요.
창세기의 노아의 이야기 앞부분의 간략한 설명입니다.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후회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언뜻 하느님의 ‘절대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아니,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모든 힘을 지니신 분이 ‘후회’할 일을 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드는 생각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완벽함에 대한 규정을 상당히 그릇되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돌덩어리’에서 완벽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존재, 모든 것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절대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완벽’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완벽일까요?
실제로 그러한 완벽을 유지하고 살아가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긋나 있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아주 차가운 돌처럼 굳어져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아주 냉정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성요셉이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성요셉 성인이 그렇게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동정 마리아는 이미 돌을 맞고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율법대로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요셉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요. 그것이 진정한 완벽성입니다. 영적 완벽성이지요. 더 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유의지’를 나누어 주셨지요. 그리고 그 자유를 통해서 당신을 사랑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을 그릇되이 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악을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고 창조된 세상을 망쳐놓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전능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 극진해서 일어난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설명을 듣고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이 역동적 사랑의 흐름을 그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면서도 노아를 남겨 두셨습니다. 이 말은 노아에게 아무런 흠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흠 없는 인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나마 나은 노아를 하느님이 선택하신 것일 뿐이지요.
사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세례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인간 존재가 세례의 물로 씻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살아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비둘기가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왔듯이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함은 여전합니다. 지금의 세상은 하느님의 전능함 속에서 움직여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왜 악을 깡그리 없애지 않느냐?’고 대들어봐야 소용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반대로 그 가운데에서 선한 이들이 더욱 강해 지기를 바라시고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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