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카인과 아벨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한가지 기본 전제를 깔아두고 이 이야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고 옳다.’는 것이지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왜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이신 걸까? 하느님은 변덕스럽고 부당한 존재인가?’를 의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이 이야기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이야기의 핵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카인의 불의와 시기, 그리고 증오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둘 다 나름 준비를 해서 제물을 바쳤지만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은 아벨이 진심으로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카인은 온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을 선택하고 카인의 제물은 굽어 보시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은총은 아벨의 제물을 향해서 나아갔고 아벨은 더욱 많은 축복을 받았겠지요.
카인은 자신의 불충실을 수용하고 뉘우치기보다 도리어 하느님에게 화를 냅니다. 우리도 가끔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에게 미흡한 것을 살피기도 전에 누군가 비난할 대상을 찾고 심지어는 하느님에게마저도 서슴지 않고 겁없이 그런 비난을 일삼는 것이지요.
불의를 행하는 자는 올바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합니다. 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있어서 빛을 싫어하지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면 기회는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자신이 지닌 어두움을 더욱 가중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곤 하지요.
물론 카인은 ‘살인’까지 이르렀지만 살인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인간사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증오하기 시작하면 전에 똑바로 바라보던 그의 얼굴을 더는 바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죄악이 내 마음 근처를 어슬렁 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선을 향해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천적으로는 오히려 반대로 행동합니다. 그에 대한 증오를 더욱 증폭시키고 더욱 큰 앙심과 원한을 품고 살아가지요. 우리는 카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쌓아둔 증오는 어떤 식으로든지 표출이 됩니다. 카인의 경우에는 살인으로 우리의 경우에는 소소한 것으로 드러나지요. 그러니 이 순환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꾸중하실 때에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카인이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때에 그를 벌하지 않으시고 충고해 주십니다. 그러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러나 결국 카인은 자신의 온전한 선택으로 악을 선택하고 실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그 와중에도 카인이 멸망하지는 않도록 징표를 남겨 주십니다. 이 일련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는 수많은 넘어짐 속에서 참으로 많이도 하느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선택을 했고 넘어져 합당한 벌을 받기도 했지요.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고 기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짧지만 아주 강렬하게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불의, 분노, 시기, 증오의 내면, 그리고 하느님의 충고와 심판, 그리고 사랑을 말이지요.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이 이야기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이야기의 핵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카인의 불의와 시기, 그리고 증오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둘 다 나름 준비를 해서 제물을 바쳤지만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은 아벨이 진심으로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카인은 온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을 선택하고 카인의 제물은 굽어 보시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은총은 아벨의 제물을 향해서 나아갔고 아벨은 더욱 많은 축복을 받았겠지요.
카인은 자신의 불충실을 수용하고 뉘우치기보다 도리어 하느님에게 화를 냅니다. 우리도 가끔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에게 미흡한 것을 살피기도 전에 누군가 비난할 대상을 찾고 심지어는 하느님에게마저도 서슴지 않고 겁없이 그런 비난을 일삼는 것이지요.
불의를 행하는 자는 올바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합니다. 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있어서 빛을 싫어하지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면 기회는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자신이 지닌 어두움을 더욱 가중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곤 하지요.
물론 카인은 ‘살인’까지 이르렀지만 살인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인간사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증오하기 시작하면 전에 똑바로 바라보던 그의 얼굴을 더는 바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죄악이 내 마음 근처를 어슬렁 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선을 향해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천적으로는 오히려 반대로 행동합니다. 그에 대한 증오를 더욱 증폭시키고 더욱 큰 앙심과 원한을 품고 살아가지요. 우리는 카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쌓아둔 증오는 어떤 식으로든지 표출이 됩니다. 카인의 경우에는 살인으로 우리의 경우에는 소소한 것으로 드러나지요. 그러니 이 순환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꾸중하실 때에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카인이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때에 그를 벌하지 않으시고 충고해 주십니다. 그러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러나 결국 카인은 자신의 온전한 선택으로 악을 선택하고 실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그 와중에도 카인이 멸망하지는 않도록 징표를 남겨 주십니다. 이 일련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는 수많은 넘어짐 속에서 참으로 많이도 하느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선택을 했고 넘어져 합당한 벌을 받기도 했지요.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고 기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짧지만 아주 강렬하게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불의, 분노, 시기, 증오의 내면, 그리고 하느님의 충고와 심판, 그리고 사랑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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