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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교제와 성

철없는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의 나이가 되면 이성교제는 진지해져야 합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책임지지 못할 행위를 하면서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신이 행한 것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에 그는 비로소 ‘성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사실 세상 사람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관계를 맺는 것에서 우리 가톨릭 교회 신자처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피임기구를 써서 임신을 예방하고 또 임신해도 낙태를 해버리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만 휴머니즘(사람들 사이에서 통상적으로 논의되는 인간됨)과 의학적인 낙태의 부작용이 걱정될 뿐이지요. ‘하느님의 뜻’ 따위는 그 안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태의 이유가 분명하면 얼마든지 낙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은 그저 ‘쾌락을 즐기는 도구’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조금 더 고상하게 포장해서 ‘성은 사랑의 표현’이라고도 하지요. 사랑이 성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두 부부는 ‘성관계’를 책임감있게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곧 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억지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서로를 이해해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의 과정’입니다. 그 안에는 단순히 기쁨과 쾌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바탕으로 둘의 사랑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절대자와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두 인간의 사랑은 한계와 약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에 대한 개념을 ‘자녀출산’에 집중시켰고 사실 아직까지도 온전히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남녀 사이의 충만하고 풍성한 여러가지 종류의 결합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능하면 성에 대해서 언급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만을 말하고자 할 뿐이지요. 실천적으로 사제나 수도자들이 그에 대해서 알리도 만무합니다.

성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충만함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성관계는 그 ‘절정’의 순간을 누리는 행위일 뿐,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남자는 자신의 특유의 남성성으로 여자는 자신의 특유의 여성성으로 일상 안에서 서로를 보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성생활이라는 것은 단순히 동물적 성행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에도, 함께 밥을 먹는 순간에도, 짧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주변의 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이 절정의 순간에 이르러 ‘성관계’를 통해서 남녀간의 사랑의 완성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신앙인들에게 이성교제는 ‘진지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클럽에 가서 불쑥 생겨나는 성적 욕구와 원나잇 스탠드를 두고 이성교제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성교제는 두 다른 성의 주체가 상대를 만나 서로의 성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의 철없음은 이성교제와 ‘섹스’를 점차적으로 혼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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