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이 당신이 지상에서 하던 일을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제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신과 더불어 움직이고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은 교회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문제는 제도가 영을 지배하려 할 때에 일어납니다. 이는 몸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인간의 의지와 정신이 몸의 욕구를 컨트롤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욕구가 지배적이 될 때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욕구가 과장되어버린 인간은 생각이 없어지고 육신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니 교회 안에 성령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제도가 갖추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도가 비대해진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영을 바꾸려 들면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는 어떠할까요? 내가 몸담은 교회가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입니다. 각각의 지역 교회는 전체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한 나라 안의 교회도 각각의 지역 교회로 나뉘어져 있고, 그 지역 교회는 다시 더욱 작은 교회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바로 교구와 본당이 그것이지요. 심지어는 그 본당 마저도 더 작은 단체들로 나뉘어져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주임 사제가 머무르는 ‘본당’을 제도 교회의 공식적인 가장 최소 단위로 삼는 것이 보통입니다.
문제는 여러 군데에 산재하고 있습니다. 사실 ‘문제가 없는 공동체는 없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몸은 없는 것과 같지요. 어딘가 손톱이 조금은 부러져 있거나 머리카락이 빠져 있거나 피부가 푸석푸석 한 것처럼 교회도 소소한 트러블들이 자꾸 일어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없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지혜와 분별이 요구됩니다. ‘생명을 악화시키는 문제’인가? 아니면 ‘일상적이고 소소한 문제’인가? 하는 것이 분별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서 커지지 말아야 할 문제들이 더욱 커지고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더욱 큰 이슈가 됩니다.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성작을 왼쪽에 놓든 오른쪽에 놓든 사실 전례를 준비하면서 소소한 그런 실수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전례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참례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미사의 신비에 동참하고자 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도끼눈을 뜨고 전례 봉사자가 무엇을 틀렸나를 지켜보는 그 마음이야말로 치유받아야 할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형식화’되고 ‘격식화’ 되었으며 아주 굳어 버렸습니다.
사제의 오류나 교회 공동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래서 성당을 가지 않는다는 이의 표현도 어리석은 표현입니다. 마치 그런 교회의 오류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한 무책임함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는 듯한 그러한 생각은 분명 어딘가 어긋나 있는 마음입니다. 마치 밥그릇에 흠이 많으니 밥을 먹지 않겠다는 생각과도 같은 것이지요.
교회는 예수님께서 만드셨고 성령께서 보증하신 것입니다. 교회에는 오류가 많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픈 것이 있으면 치유해 나가고 보듬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 아픈 것이 있다고 냅다 잘라버리기 시작하면 남는 지체가 없습니다.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죽을 병에 걸린 지체는 전체의 몸을 위해서 잘라내어야 하겠지만 쓸데없는 수술과 지나친 수술은 도리어 몸을 망가뜨립니다. 하느님의 성령과 지혜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문제는 제도가 영을 지배하려 할 때에 일어납니다. 이는 몸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인간의 의지와 정신이 몸의 욕구를 컨트롤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욕구가 지배적이 될 때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욕구가 과장되어버린 인간은 생각이 없어지고 육신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니 교회 안에 성령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제도가 갖추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도가 비대해진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영을 바꾸려 들면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는 어떠할까요? 내가 몸담은 교회가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입니다. 각각의 지역 교회는 전체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한 나라 안의 교회도 각각의 지역 교회로 나뉘어져 있고, 그 지역 교회는 다시 더욱 작은 교회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바로 교구와 본당이 그것이지요. 심지어는 그 본당 마저도 더 작은 단체들로 나뉘어져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주임 사제가 머무르는 ‘본당’을 제도 교회의 공식적인 가장 최소 단위로 삼는 것이 보통입니다.
문제는 여러 군데에 산재하고 있습니다. 사실 ‘문제가 없는 공동체는 없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몸은 없는 것과 같지요. 어딘가 손톱이 조금은 부러져 있거나 머리카락이 빠져 있거나 피부가 푸석푸석 한 것처럼 교회도 소소한 트러블들이 자꾸 일어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없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지혜와 분별이 요구됩니다. ‘생명을 악화시키는 문제’인가? 아니면 ‘일상적이고 소소한 문제’인가? 하는 것이 분별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서 커지지 말아야 할 문제들이 더욱 커지고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더욱 큰 이슈가 됩니다.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성작을 왼쪽에 놓든 오른쪽에 놓든 사실 전례를 준비하면서 소소한 그런 실수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전례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참례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미사의 신비에 동참하고자 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도끼눈을 뜨고 전례 봉사자가 무엇을 틀렸나를 지켜보는 그 마음이야말로 치유받아야 할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형식화’되고 ‘격식화’ 되었으며 아주 굳어 버렸습니다.
사제의 오류나 교회 공동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래서 성당을 가지 않는다는 이의 표현도 어리석은 표현입니다. 마치 그런 교회의 오류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한 무책임함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는 듯한 그러한 생각은 분명 어딘가 어긋나 있는 마음입니다. 마치 밥그릇에 흠이 많으니 밥을 먹지 않겠다는 생각과도 같은 것이지요.
교회는 예수님께서 만드셨고 성령께서 보증하신 것입니다. 교회에는 오류가 많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픈 것이 있으면 치유해 나가고 보듬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 아픈 것이 있다고 냅다 잘라버리기 시작하면 남는 지체가 없습니다.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죽을 병에 걸린 지체는 전체의 몸을 위해서 잘라내어야 하겠지만 쓸데없는 수술과 지나친 수술은 도리어 몸을 망가뜨립니다. 하느님의 성령과 지혜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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