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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운명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창세4,10-12)

피를 받은 땅은 불의를 당한 이들의 마음을 말합니다. 땅은 마음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성경의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앗이 심겨지는 땅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부당함을 당하고 나면 그 부당함을 행한 대상을 마음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이들이 우리에게 해코지를 했을 때에 우리는 그들을 우리 마음에서 자연스레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땅을 부친다는 말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수확은 마음을 얻는 것, 즉 사랑을 얻는다는 의미이지요. 타인의 마음을 망가뜨린 사람은 어딜 가도 수확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망가뜨린 이는 다른 이에게 가서 기만할 수는 있지만 진실로 그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일을 행하는 본인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타인의 마음을 망가뜨리는 사람, 즉 거짓, 기만, 악의, 방탕, 증오, 시기, 탐욕 등등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해치는 그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는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마음을 둘 곳을 잃어버리게 되지요.

저주는 하느님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는 자신이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의 무서운 부분입니다. 자신이 끌어들이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 것이 저주이지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축복과 저주를 인간 앞에 놓아둘 뿐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신명30,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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