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난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연옥’에 대한 의문이 등장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신데 왜 ‘연옥’을 내버려 두시냐는 것이지요. 그냥 천국으로 직행하면 될 것을 왜 고통스러운 정화의 시간을 만들어 두셨냐는 것이 질문의 골자였습니다.
저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곳을 스스로 선택하는 거라고 말이지요. 사실이 그러합니다. 연옥에 있는 이들은 천국이 싫어서 천국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천국이 불편하기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뜻 들어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기에게 100미터 달리기를 20초만에 주파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그렇다고 아이가 뛰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지요. 뛰고는 싶지만 아직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 아이를 100미터 선수들이 연습하는 단체구보팀에 넣어 버리면 그 아이는 거기에서 같은 강도의 훈련을 하다가 숨이 턱까지 차서 죽어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훗날 마주하게 될 현실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처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이들도 스스로 선택해서 거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느님이 거기에 밀어넣은 것이 아니지요. 10년동안 땅굴에서 살아온 이에게 갑자기 만나게 되는 태양은 눈을 태우는 듯한 아픔을 가져올 것입니다. 세상에서 온갖 부정적인 것들과 어울려 살아온 이들은 진리이요 빛이신 하느님을 만나면 불에 타는 듯한 아픔을 느껴 스스로 어둠을 찾아 기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럼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느님은 왜 ‘지옥’을 없애 버리시지 않는 걸까요? 왜 세상을 ‘온전한 빛’만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지 않으시는 걸까요?
먼저 말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른다’는 것이 저로서는 솔직한 대답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으면 ‘자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흰색 크레파스만을 바닥에 깔아 두고는 여러분 마음대로 고르라고 한다면 그건 독재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검은색을 선택할 가능성이 존재함에도 흰색을 선택하기에 그 선택이 소중한 것이 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선’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면 설령 남에게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칭찬받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면 그 사랑이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닐 뿐더러 설령 그렇게 드러나는 모든 행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의미없는 것일 뿐입니다.
간단하게 요점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다만 선택의 여지를 넓혀두셨고 그 선택을 하는 것은 자유를 지닌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죄를 지으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그 누구라도 하느님이나 다른 존재를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환경 속에서 인간은 선과 악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천국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아니, 천국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자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기만하는 것’이 일상화되어있는 곳에 머무를 뿐입니다.
저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곳을 스스로 선택하는 거라고 말이지요. 사실이 그러합니다. 연옥에 있는 이들은 천국이 싫어서 천국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천국이 불편하기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뜻 들어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기에게 100미터 달리기를 20초만에 주파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그렇다고 아이가 뛰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지요. 뛰고는 싶지만 아직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 아이를 100미터 선수들이 연습하는 단체구보팀에 넣어 버리면 그 아이는 거기에서 같은 강도의 훈련을 하다가 숨이 턱까지 차서 죽어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훗날 마주하게 될 현실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처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이들도 스스로 선택해서 거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느님이 거기에 밀어넣은 것이 아니지요. 10년동안 땅굴에서 살아온 이에게 갑자기 만나게 되는 태양은 눈을 태우는 듯한 아픔을 가져올 것입니다. 세상에서 온갖 부정적인 것들과 어울려 살아온 이들은 진리이요 빛이신 하느님을 만나면 불에 타는 듯한 아픔을 느껴 스스로 어둠을 찾아 기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럼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느님은 왜 ‘지옥’을 없애 버리시지 않는 걸까요? 왜 세상을 ‘온전한 빛’만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지 않으시는 걸까요?
먼저 말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른다’는 것이 저로서는 솔직한 대답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으면 ‘자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흰색 크레파스만을 바닥에 깔아 두고는 여러분 마음대로 고르라고 한다면 그건 독재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검은색을 선택할 가능성이 존재함에도 흰색을 선택하기에 그 선택이 소중한 것이 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선’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면 설령 남에게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칭찬받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면 그 사랑이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닐 뿐더러 설령 그렇게 드러나는 모든 행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의미없는 것일 뿐입니다.
간단하게 요점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다만 선택의 여지를 넓혀두셨고 그 선택을 하는 것은 자유를 지닌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죄를 지으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그 누구라도 하느님이나 다른 존재를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환경 속에서 인간은 선과 악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천국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아니, 천국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자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기만하는 것’이 일상화되어있는 곳에 머무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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