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엔가는 누군가에게 ‘부족함’을 남길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예수님조차도 모든 이가 원하는 것을 100퍼센트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그리고 고위 사제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언제나 불평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누군가가 불평을 할 때에 우리가 살펴봐야 할 대상은 단순히 불평의 원인이 되는 사람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적지 않은 경우에 불평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불평을 해야할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겠지만 ‘불평을 한다’는 것 자체로 드러내는 면모도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예수님의 불평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굳이 불평이라고 한다면 단 한 번, 게쎄마니 동산에서 수난의 잔을 치워줄 수 없느냐고 부탁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불평이 될 수 없는 것이 결국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는 걸로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셨기 때문이지요.
불평하는 사람은 ‘나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만일 순리에 맞지 않다면 순리대로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불평하는 사람은 이치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일이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볼일을 본 후 변기 시트를 올려야 하는가 내려야 하는가가 불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변기 시트는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는 것인데 자신의 마음에 들기 않아서 불평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주면 감사히 먹을 밥인데 음식이 조금 짜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정말 짜서 먹지 못하는 경우라면 배가 고픈 사람에게 주더라도 먹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고쳐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음식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 입맛에 맞지 않아서’ 불평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고 투덜거리고 있을까요? 그것이 정말 순리에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내가 싫어서 그런 것일까요? 곰곰이 성찰해 본다면 얻을 것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불평을 할 때에 우리가 살펴봐야 할 대상은 단순히 불평의 원인이 되는 사람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적지 않은 경우에 불평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불평을 해야할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겠지만 ‘불평을 한다’는 것 자체로 드러내는 면모도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예수님의 불평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굳이 불평이라고 한다면 단 한 번, 게쎄마니 동산에서 수난의 잔을 치워줄 수 없느냐고 부탁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불평이 될 수 없는 것이 결국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는 걸로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셨기 때문이지요.
불평하는 사람은 ‘나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만일 순리에 맞지 않다면 순리대로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불평하는 사람은 이치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일이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볼일을 본 후 변기 시트를 올려야 하는가 내려야 하는가가 불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변기 시트는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는 것인데 자신의 마음에 들기 않아서 불평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주면 감사히 먹을 밥인데 음식이 조금 짜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정말 짜서 먹지 못하는 경우라면 배가 고픈 사람에게 주더라도 먹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고쳐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음식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 입맛에 맞지 않아서’ 불평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고 투덜거리고 있을까요? 그것이 정말 순리에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내가 싫어서 그런 것일까요? 곰곰이 성찰해 본다면 얻을 것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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