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바친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소유인 무언가를 상대에게 내어주고 상대의 소유가 되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뭔가 보상을 바라고 했다면 ‘거래’라고 했겠지요.
봉헌을 하는 이유는 상대의 진실함과 선함을 굳게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상대가 받자마자 파괴시켜 버릴 것을 안다면 나의 소중한 것을 내어줄 이유가 없겠지요.
‘봉헌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는 생활을 하느님에게 봉헌해서 하느님이 원하는 생활을 하게끔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봉헌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봉헌생활을 기념하는 날은 ‘수도자들’이 자신의 허원을 다시금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날은 엄밀히 말하자면 수도자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봉헌’을 한 것으로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이 애시당초 있어서는 안되고 이미 내어준 것은 그것을 받은 이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전 세계에 두루 퍼져있는 모든 수도자들이 하느님 앞에 진실한 ‘봉헌’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수도원에 가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인기를 기다리고, 인정을 받으려 하고,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하고, 소유한 물건에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전혀 ‘봉헌하지 않은 봉헌생활’을 하는 괴상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봉헌을 하는 이유는 상대의 진실함과 선함을 굳게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상대가 받자마자 파괴시켜 버릴 것을 안다면 나의 소중한 것을 내어줄 이유가 없겠지요.
‘봉헌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는 생활을 하느님에게 봉헌해서 하느님이 원하는 생활을 하게끔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봉헌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봉헌생활을 기념하는 날은 ‘수도자들’이 자신의 허원을 다시금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날은 엄밀히 말하자면 수도자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봉헌’을 한 것으로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이 애시당초 있어서는 안되고 이미 내어준 것은 그것을 받은 이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전 세계에 두루 퍼져있는 모든 수도자들이 하느님 앞에 진실한 ‘봉헌’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수도원에 가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인기를 기다리고, 인정을 받으려 하고,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하고, 소유한 물건에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전혀 ‘봉헌하지 않은 봉헌생활’을 하는 괴상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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