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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창세 1,1-2)

우리는 우리의 위치에서 사물들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드로메다에서 우리 은하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합니다.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거울이 없이는 우리 뒷통수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우리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으려고 하고 그 관점이라는 것의 상당 부분이 부족한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즉,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창세기를 ‘과학’이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보려고 한 것입니다. 물론 과학도 많이 발전해서 전에는 지구가 네모지다고 생각한 것을 이제는 둥글다고 알고 있고, 빅뱅에 관한 이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아직 많은 부분이 부족하고 모자란 관점입니다.

이는 아주 간단하게 ‘인간’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으로 아무리 뒤져 보아야 인간 안에 숨어 있는 ‘영혼’을 관찰하지는 못합니다. 언젠가 영혼의 무게가 8그램 이라는 과학의 보고가 있었지만 그 사실을 근거로 우리의 선과 사랑, 그리고 죄악과 탐욕에 대해서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창세기라고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단순히 세상 만물의 ‘물질적 창조’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이것만한 ‘거짓말’이 없는 셈이지요. 지금 현대의 과학의 관점에서 창세기는 정말 엉뚱한 거짓말을 담고 있는 책일 뿐입니다. 차라리 ‘빅뱅이 있었다, 그 첫 폭발 뒤로 물질들이 튀어나와 서로 엉겨 붙으면서 서서히 식어가며 지금의 우주의 초창기 단계를 형성했다…’라고 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창세기는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창세기는 하느님의 ‘창조’ 그 자체를 다룬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창세기를 요리조리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창세기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배워야 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창조입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이 세상은 하느님에게서 비롯한 것이라는 게 핵심입니다. 하느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세상,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비롯한 총체적인 세상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물질적 세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우리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영적 세상’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너무나도 쉽게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 창세기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주도권과 영과 육을 포괄하는 창조의 범위를 바탕으로 창세기를 읽고 해석해 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창세기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여전히 많은 젊은이들은 창조와 진화 사이의 캐캐묵은 다툼을 두고 고민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둘은 전혀 다툴 이유가 없는데 그런 다툼을 조장하는 이의 논리에 젖어들어 있는 것이지요. 진화는 창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작은 과정일 뿐입니다. 진정한 창조는 영과 육을 모두 포괄하니까요. 저는 하느님의 창조가 첫 시작을 통해 틀을 마련하였지만 아직도 작은 부분에서 계속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얼마든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새로이 이루어 낼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누가 압니까? 하느님이 인간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휴대폰을 만드셨을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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