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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좋아하는 단식

이번 설은 재의 수요일과 사순 시기가 끼어 있어서 소위 ‘열심한’ 분들에게는 상당히 신경쓰이는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역 교회별로 지침을 내려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영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참으로 성실하고 철저한 교회입니다. 오죽하면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교회’라는 별칭까지 얻었을까요. 하지만 그 별명이라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별명이 아니라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의미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예의와 법규를 중시해 왔기 때문이지요. 유교의 문화 안에 살아왔지만 유교 신자는 별로 없고 다만 유교의 외적인 부분이 상당히 우리의 삶 안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진 그리스도교적 예법은 어찌보면 우리의 정서와 굉장히 맞아들어간 셈이지요. 사제에 대한 예우, 전례 예절에 대한 엄중함과 같은 것들은 다른 나라 어디를 가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재를 지킴’은 무시할 수 없는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때를 철저히 지키고 나이의 규정도 잘 살펴야 하며, 음식의 종류도 철저히 지킵니다. 즉, 단식의 시기가 언제인지, 몇 살부터 몇 살까지 가능한지, 어떤 음식은 가능하고 어떤 음식은 가능하지 않은지가 단식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잊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단식을 하는가?’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단식을 왜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왜 단식을 하는 걸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식을 열심히 하긴 하지만 도대체 왜 하려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주 친절히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단식은 단순히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식은 ‘남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덕이 돌아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빵을 먹고 싶지만 이날 만큼은 그 빵을 먹는 것을 참고 그 빵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줌으로써 그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에게 내어바치는 감사의 덕이 나에게도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배경으로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나 자신이 아니라 잔치의 손님들을 위해서 단식의 기회를 보류하는 것이 그 자체로 일종의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말하자면, 재의 수요일날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만이 가톨릭 신자라고 할 때에, 나는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따라 단식을 하고 싶지만 친척들의 기쁨을 상쇄시키지 않기 위해서 기꺼이 그들과 어울려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단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고 신자가 아닌 어르신이 내미는 정성 가득한 음식을 안 먹는다고 버티고, 엄마가 미처 생각을 못하고 고기를 넣고 끓인 국을 두고 안 먹는다고 하면서 엄마에게 빈정대는 것은 결코 그분이 원하는 단식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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