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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됨을 추구하는 사람들, 본질을 찾는 사람들

진중하게 헛됨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소박하게 본질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헛됨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리 진지한 제스츄어를 보인다고 해도 이야기를 들을수록 피곤해지는 자신을 느낍니다. 반대로 소박하게 본질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야기의 길고 짧음이나 언어의 수준에 상관없이 마음이 충만해지는 걸 느낍니다.

대학 교수라고, 어느 의대 학장이라고 하시는 분들과는 그 전공분야의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으로서 그런 분들과 학업이나 의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이유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만나면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눌 뿐이지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의 ‘인격’에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운만큼 인격이 자동으로 쌓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를 허다하게 만납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지은 할아버지나 일용직 노동자에게서 인내와 배려를 만나고, 반대로 고위직, 화이트 칼라에게서 성급함과 교만을 발견하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를 알아차리게 되지요. 상대가 얼마나 진중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몇마디 나눠보면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는 적절한 수준의 반응을 합니다.

본질을 찾는 이들은 본질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런 ‘개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그의 ‘본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진국’이라고도 하지요.

진국이 되십시오. 소리만 요란한 깡통이 되지 마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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