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르6,56)
그들은 병자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육체를 지니지 못한 이들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육체의 병은 정신과 무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이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 그들의 영은 어두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유, 그것은 예수님에게 접대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유는 예수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저마다의 ‘부족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의사에게 아픔을 숨기지 않습니다. 의사에게는 솔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치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겉치레 인사를 나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였지만 자신을 열어보이지 못했고 결국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가난한 이들은 그분의 권능을 알아보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육체의 치유, 정신의 치유, 영의 치유를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단순히 종교적으로 쓰이는 형식적 표현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자신의 손에 든 먹을 것을 주지는 않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그건 ‘위선’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면서 가르칠 바를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유로 치유를 베풀었고 빵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 우리는 그런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애써 거짓 위선으로 우리의 죄와 어두움을 가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테니까요.
그들은 병자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육체를 지니지 못한 이들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육체의 병은 정신과 무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이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 그들의 영은 어두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유, 그것은 예수님에게 접대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유는 예수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저마다의 ‘부족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의사에게 아픔을 숨기지 않습니다. 의사에게는 솔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치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겉치레 인사를 나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였지만 자신을 열어보이지 못했고 결국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가난한 이들은 그분의 권능을 알아보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육체의 치유, 정신의 치유, 영의 치유를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단순히 종교적으로 쓰이는 형식적 표현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자신의 손에 든 먹을 것을 주지는 않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그건 ‘위선’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면서 가르칠 바를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유로 치유를 베풀었고 빵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 우리는 그런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애써 거짓 위선으로 우리의 죄와 어두움을 가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테니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