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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9일기도



어제 9일기도 장례를 위해서 찾아가 집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음침함이 엄습해 왔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초라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있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이들은 그저 하나의 통과의례로 저를 초대했을 뿐, 망자를 위한 진실한 애도나 신앙과의 연계성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아저씨는 술에 취해 반쯤 풀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러나 상황이 좋든 나쁘든 복음은 전해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하던 대로 장례 예식서를 꺼내 들고 열처녀의 비유가 있는 복음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물론 제가 읽는 복음 구절을 진실로 마음을 다해 듣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는 체험적으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좋은 오후입니다. 제가 누군지 아는 분 있으신가요? (당연히 아는 사람이 없었지요. 헌데 그 중의 아저씨 한 명이 아는 척을 합니다. 주일 미사에 나와 본 적이 있다면서 말이지요.) 좋습니다. 그럼 제 스타일을 잘 아시겠군요. 마음 준비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행복을 기반으로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돈을 벌고 하는 모든 것들이 ‘행복’에 촛점이 맞춰져 있지요. 하지만 과연 무엇이 행복입니까? 과연 우리는 정말 행복을 찾는 걸까요?

가령 술을 마시는 아저씨를 예를 들어 봅시다.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술을 마십니다. 술을 마시는 순간만큼은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과연 이 아저씨는 정말 행복을 찾는 걸까요? 이 아저씨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있을까요? 이 아저씨는 곁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눈물을 올바로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 행복일 뿐입니다. 이기적인 행복이지요. 다른 이들이 어찌 되건 말건 자기 혼자 행복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0계명을 알고 있습니다. 어디 여기 아이가 있네요. 한 번 물어볼까요? 거짓말하면 되니 안되니? (안돼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맑은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고 이는 바른 길과 그른 길을 구별하게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점점 변해갑니다. 때로 우리의 욕심을 위해서는 거짓말 조금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들이 엇나가기 시작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뭔가 크게 엇나가서 충격을 받으면 그제서야 하느님을 찾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이들을 ‘영적 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장님들은 환한 대낮에도 눈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해서 장애물들을 피하지 못하고 부딪히곤 하니까요.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챙깁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잠자리를 제공하고 교육을 시키지요. 하지만 신앙에 관해서 만큼은 지독히도 소홀합니다. 그리고나서 아이가 나중에 나쁜 마음을 지니게 되면 그 아이로 인해서 마음 아파 하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한탄을 하곤 하지요. 하지만 그 아이는 다른 이가 아니라 부모에 의해서 신앙을 물려받게 됩니다.

성당에서 아무리 정직을 가르치면 무엇 하겠습니까? 집에서 엄마가 거짓된 삶의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당장 거짓을 배우게 됩니다. 성당에서 아무리 하느님이 중요하고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집에서 엄마 아빠가 매일 저녁마다 돈 때문에 싸우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지요.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께서 부어주신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을 훗날 하느님께서는 거두어 가십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망자는 그 좋은 본보기이지요. 여기 서 있는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100년이 지나서도 남아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즉 하느님께서 원하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참된 영혼을 이루는 것이지요. 향기로운 영혼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악행의 악취가 나는 영혼이 아니라 선하고 맑고 선행으로 가득한 영혼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저는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여기 온 사제입니다. 저는 사실 망자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죽은 이는 하느님의 손에 맡겨집니다. 저는 여러분들, 즉 아직도 들을 귀가 존재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여기 와 있습니다.

모쪼록 보다 참되고 올바른 것을 찾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되시길 바랍니다.”

대충 이렇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물론 보다 구체적으로 더 많은 예들을 들어 주었습니다. 성폭행에 관한 이야기도 했고 가정 폭력에 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아저씨가 제 손을 맞잡으면서 참 잘 들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 본당에 찾아가면 만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수요일 오후로 시간 약속을 잡았습니다. 또 어떤 인생의 책이 제 앞에 펼쳐질지 두고 볼 일이지요. 저는 해결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미약한 빛을 비춰줄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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