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신뢰 관계가 없으면 형식이 중요해집니다. 그를 잘 모르니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절차와 예의 관계가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내가 누군가와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데 선물로 양말을 하든 과일을 하든 행여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선물을 하지 못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사회적 지위와 연륜을 따져가면서 그에 합당한 선물을 준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례라는 것은 원래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행위를 말합니다. 헌데 이 감사와 찬양이 그분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면서 ‘법적인 절차’로 변질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을 지켜야 하는지 저것을 지켜야 하는지,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고 무엇이 뒤따라야 하는지가 참으로 중요하고 마치 전부인 것처럼 대두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근본에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찬미’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는 갓난쟁이가 아니라서 철없는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합당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이 전제되었을 때에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의를 갖추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두려워해서가 아닌 것이지요.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이 근본적인 시각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을 매서운 심판관으로, 깐깐한 행정관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미사에 나가고 성사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하고 그 은총을 받아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미사는 지루하기만 한 행위가 되고 고해는 판공이라는 이름의 의무가 되고 나머지 예식들도 저마다의 두꺼운 규정집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하는 겉치례 예식이 되니 당연히 마음이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명백한 죄인은 되고 싶지 않으니 이런 저런 규정들을 따지고 최소한 그 울타리는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 법적 규정 안에서 궁금해하는 것들이 과연 정말 그것이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공식적인 멸망에는 빠지지 않기 위한 것인지는 하느님과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모든 규정을 준수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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