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기뻤다면 그 기쁨은 맛있는 음식과 연회, 혹은 좋은 술이나 옷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즐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슬펐다면 그 슬픔은 육체적 고난이나 과중한 업무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올바름을 내치는 이들의 닫힌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행복과 슬픔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여전히 좋은 것을 취하는 데에 있고, 우리의 슬픔은 고통을 당하거나 무언가를 잃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분별 기준이 없다면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대상이 과연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분별할 기준도 없는 셈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나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그분의 진리를 자신의 중심에 세우고 사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틀만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에 유익이 되게 살아가느냐, 혹은 아예 예수님 없이, 그분을 철저히 무시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갈림이 있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색채는 누구나 지닐 수 있으며 자신의 약력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적어 넣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가 어떤 교회를 자주 들르고 외적으로 어떤 면모를 보이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핵심은 우리가 예수님과 ‘공감’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공감’하는 바를 ‘실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공감만 할 뿐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끊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깨달음이지요. 오히려 자신이 끊어야 하는 이유를 아는데에도 불구하고 더욱 피워야 하는 자신의 내적 욕구를 재확인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사랑해야 하는 상황에서 증오와 복수심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데에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영혼이 어둠으로 떨어지는 데에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 밖의 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들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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