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들도 서로 용서를 합니다. 즉, 모든 손해가 기워 갚아 졌을 때에 그들도 ‘용서’를 베풉니다. 그리고 그런 용서는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가해진 손해가 모두 메꾸어졌을 때에 누구나 용서할 마음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배우는 용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수많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는 초자연적인 것이고 천상적인 차원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역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천상적인 차원의 용서를 베풀지 못합니다. 우리는 늘 ‘손해보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되고 따라서 결코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용서는 우리의 믿음을 역으로 드러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지요. 즉, 상대에게서 아무런 회복을 얻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수많은 이들이 이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지식적인 차원에서 알지만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용서에 이르지 못합니다. 용서는 어느 순간 가능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려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그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자라고 믿음도 자라게 됩니다.
상대의 부족함과 나약함과 오류를 감싸 안을 줄 아는 내적 의지를 키워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우리 스스로의 죄도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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